[쿠키뉴스=권남영 기자] 언제 이렇게 컸는지 모르겠다. 최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여진구(18)는 더 이상 아역배우라는 타이틀이 어울리지 않았다. 이렇게 진지한 인터뷰는 처음이었다. 마치 ‘진구 오빠’라고 불러도 될 것만 같았다.
영화 ‘내 심장을 쏴라’에서 여진구는 정신병을 앓고 있는 25세 청년 수명을 연기했다. 실제 나이보다 무려 6세 많은 역할이다. 게다가 실제 띠동갑인 배우 이민기(30)와 극중 동갑으로 나온다. 첫 성인연기가 부담스럽지 않느냐고 했더니 여진구는 “배역에 있어서 나이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가 수명 캐릭터를 선택하면서 고민한 건 다른 부분이었다. 실제 본인과 전혀 닮은 점이 없어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막막했다는 것이다. 여진구는 “저랑 전혀 다른 인물이라 고민이 많이 됐지만 한편으로는 오히려 그래서 끌렸다”며 “그런 끌림 때문에 ‘내 심장을 쏴라’를 선택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수명이 되는 건 생각보다 만만치가 않았다.
“막상 촬영에 들어가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수명을 알아내는 게 힘들었어요. 제가 실제로 정신분열증 앓고 계신 분을 만나 뵈러 폐쇄병동에 갈 수도 없었고…. 쉽지 않더라고요. 그리고 여태까지 나온 비슷한 정신병원 소재의 영화들을 봐도 수명같은 캐릭터 없었고요.”
정유정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내 심장을 쏴라’는 정신병원에서 만난 승민(이민기)과 수명(여진구)의 우정을 통해 청춘의 희망을 이야기하는 영화다. 극중 수명은 어린 시절 겪은 트라우마로 인해 인생에 대한 의욕 없이 병원에서 조용히 살고자하는 인물이다. 눈빛엔 늘 두려움이 가득 하고 행동은 왠지 주눅이 든 듯 조심스럽기만 하다. 분명 쉽게 표현할 수 있는 캐릭터는 아니었다.
“초반에 제가 연기를 하면서도 흔들린 점도 있었어요. 당시엔 몰랐죠. ‘내가 원작에 얽매여있구나’라는 생각을 못했었어요. 그냥 좀 경직돼있고 부담스럽다는 생각이 들어서 ‘왜 이럴까’ 싶었죠. 그런데 촬영을 하다가 신기하게도 승민의 대사들을 들으면서 바뀌었어요. 승민이 수명에게 ‘넌 누구냐’ ‘숨는 놈, 견디는 놈 말고 네 인생을 상대하는 놈이 있긴 하냐’ 이런 말을 하는데 실제 저한테도 많이 꽂혔어요.”
그렇게 서서히 여진구는 자신 안에서 수명을 찾았다. 캐릭터를 자연스럽게 이해하면서 어떤 일체감을 느꼈다. 그는 “처음 소설 읽을 땐 ‘얘는 나랑 정말 다른 애구나’라고 생각했었는데 내 안에 있는 수명 같은 점들을 발견한 후부터는 되게 친밀해진 느낌이 들었다”며 “그때부터는 좀 한결 연기하는 게 부드러워졌다”고 고백했다.
이런 과정들이 그에겐 특별한 경험이었다. 평소 공부하듯 캐릭터를 분석해 연기하던 그가 그 때 그 때 감정에 따라 연기하는 재미를 느끼게 된 것이다. 여진구는 “연기가 부드러워진 이후엔 마음이 정말 편해졌다”며 “이번엔 진짜 현장에서 드는 감정 그대로 연기한 게 많았다”고 회상했다.
“‘이건 내가 진짜 무슨 감정인지 모르겠다’ 싶을 때도 막 ‘어떡하지’ 고민하는 게 아니라 ‘모르겠으면 현장 가서 해보지 뭐’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 게 좀 많이 바뀐 것 같아요. 사실 저는 (제가 연기하는) 인물에 대해서 어떻게 해서든 뭐라도 풀어보고 가는 그런 경향이 있었거든요. 아무리 복잡해도 조금이라도 풀어보려는. 근데 이제는 ‘연기할 때 드는 감정을 사용해보자’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됐어요. 이번 영화로 그런 부분에서 성장한 것 같아요.”
여진구는 어느덧 경력 9년차의 배우다. 15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캐스팅 된 영화 ‘새드무비’(2005)를 통해 데뷔한 뒤 부지런히 여러 작품에 얼굴을 비췄다. 대중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작품은 MBC 드라마 ‘해를 품은 달’(2012)이었다. 나이답지 않은 진중함이 돋보였다. 누나 팬들을 설레게 한 중저음의 목소리는 덤이었다.
이후 그는 연기적으로 눈부신 성장세를 보였다.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2013)에서 보여준 캐릭터 소화력은 놀랍기까지 했다. 김윤석, 장현성, 조진웅, 김성균 등 걸출한 선배들 사이에서 17세라는 나이를 믿기 힘든 존재감을 뽐냈다. 선배들과의 호흡은 그를 또 한 발짝 성장하게 했다.
“선배님들 연기를 보면 소름이 돋아요. 되게 신기한 것 같아요. 딱 그 인물에게 필요한 만큼만 감정을 꺼내서 사용하시더라고요. 저는 부족한 게 많아서 감정을 더 쓸 때도 있고 컨디션 안 좋으면 안 나올 때도 있는데, 선배들은 높게도 낮게도 아니고 딱 필요한 정도로. 그리고 울부짖고 이런 건 오히려 감정 쌓으면 되는데 잔잔한 일상연기가 더 어렵거든요. 선배님들은 그걸 아무렇지 않게 하시니까 (놀라워요). 따라할 수 없는 연기적인 내공을 많이 느껴요.”
인터뷰 내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연기에 대해 얘기하는 그를 보며 ‘천상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아역배우들은 평범한 일상을 누리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갖곤 한다. 하지만 여진구는 달랐다. 그는 배우생활이 “행운인 것 같다”고 했다.
“저는 지금 되게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더구나 많은 분들이 관심 가져주시고 응원까지 해주시니까 사실 지금 너무 행복해요. 정말 행운인 것 같고요. 물론 10대 학교생활에 대한 추억은 다른 친구들보다 비교적 적을 순 있겠지만 저는 어쨌든 더 좋은 경험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좋아하고 원하는 목표에 한발자국이라도 더 다가가고 있는 느낌도 들어요. 단순하게 친구들이랑 못 노니까 아쉬운 건 많았는데 (배우 일에 대해) 후회하는 건 전혀 없어요.”
올해 고3이 되는 그는 내년이면 진짜 성인배우가 된다. 고민이나 걱정이 되진 않느냐고 물었더니 여진구는 “오히려 기대가 많이 된다”며 웃었다. 그는 “20대 되면 할 수 있는 일도 많아지고 하고 싶은 일도 많아지지 않겠느냐”며 “슬프고 안 좋은 경험이라도 많이 해봤으면 좋겠다. 제대로 부딪히고 싶다”고 답했다. 그때 아니면 쌓을 수 없을 것 같다는 게 이유였다.
예전엔 단지 좋아서 연기를 했다는 여진구는 “이젠 약간 진지함과 책임감이 생긴 것 같다”고 말했다. 재밌어하되 가볍진 않게 연기하고 싶다고 했다. 배우로서 가지는 참 건강한 생각과 욕심이었다. 이루고픈 목표도 확실했다. 그는 불가능할지도 모른다고 했으나 왠지 의심스럽지가 않다.
“개인적으로 후회나 아쉬움이 없는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어요. 제가 봐도 ‘진짜 잘했다’하는. 뭐 하나 추천해달라고 하면 한 치 고민도 없이 말할 수 있는 작품이 있는 배우요. 연기 경력이 쌓일수록 더 표현하고 싶은 게 다양해질 테고 게다가 완벽해져야하니까 가능할까 싶기도 한데(웃음). 목표니까 괜찮겠죠? 일단은 그걸 향해 가려고요.” kwonn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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