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김현섭 기자] 9일 오후 열린 원세훈(64) 전 국가정보원장 사건의 항소심 재판부(서울고법 형사6부·부장판사 김상환)는 국정원의 불법 선거개입을 질타하면서 국정원이 직접 작성한 ‘과거의 대화, 미래의 성찰’이라는 보고서를 인용해 눈길을 끌었다.
국정원이 2007년에 작성한 이 보고서는 국가 정보기관이 연루된 과거사의 진실 규명을 위해 2004년 발족한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진실위)’가 3년 간의 활동을 담은 것이다.
총 6권으로 된 이 보고서에는 김대중 납치사건과 KAL 858기 폭파 사건, 인혁당과 민청학련 사건, 동백림 사건 등 진실위가 파헤친 7대 사건에 대한 조사결과와 함께 정치·사법·언론·노동·학원·간첩 등 6개 분야에서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와 국가안전기획부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여실히
담겨있다.
즉, 국정원이 과거 자신들의 잘못을 스스로 털어놓고 있는 일종의 ‘자기 고백서’인 셈이다.
재판부는 “국정원은 이 보고서를 통해 과거의 잘못된 부분을 솔직하게 드러내면서 정보기관에 대한 국민의 지지와 신뢰를 얻기 위한 의지를 천명했다”며 “이 가운데 이번 사건과 관련해 원용할 수 있는 대목이 있다”고 말문을 열었다.
재판부가 판결문에 인용한 보고서에 따르면 국정원은 “정보기관의 정치개입 중에서도 ‘선거개입’은 그 어떠한 명분으로도 정당화되거나 합리화될 수 없는 문제”라고 썼다.
잘못 중에서도 ‘선거 개입’에 대해 특히 강한 자성의 목소리를 낸 것이다.
보고서는 “정보기관의 불법적인 선거개입은 정치적 독립성을 지켜야 할 정보기관이 자신의 존립 근거를 스스로 훼손하고 민주주의 사회의 최고 주권자인 국민 위에 군림하는 행위”라고 비판하며 “선거에 영향을 주거나 처음부터 특정 정치세력에 유리한 선거결과를 유도하고자 기획하고 이를 실행하는 행위는 어떠한 측면에서도 용인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재판부는 “국정원이 솔직한 반성과 깊은 성찰의 결과로 스스로 만든 이러한 거울 앞에 서서 피고인들이 과연 이 사건 사이버 활동의 적법성과, 그것이 합리적인 우리 국민에게 어떻게 이해될 것인지를 진지하게 따져봤는지 극히 의문”이라고 꼬집었다.
재판부는 “국정원은 출범 이래 줄곧 직원의 정치개입을 일절 금지해 왔음에도 정치 및 선거개입으로 국민의 비난을 받거나 심지어 국정원장이 징역형을 선고받은 사례도 있었다”며 “이런 사정을 고려하면 엄정한 단죄로 국정원이 자기 점검 및 통제의 계기로 삼도록 할 필요가 있다”고 질타했다.
재판부가 말한 국정원장의 징역형 선고 사례는 권영해 전 안기부장이다.
안 전 부장은 지난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재미 교포 윤홍준씨에게 돈을 주고 당시 김대중 후보를 비방하는 기자회견을 열도록 해 징역 5년의 실형을 선고받은 바 있다.
재판부는 “이번 사건은 안기부가 국정원으로 이름을 바꾼 1999년 이후 국정원의 선거개입 의혹이 확인된 경우가 거의 없어 국민의 신뢰가 축적돼가고 있던 시점에 벌어진 것이어서 혹여라도 유사 활동이 계속될 위험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는 말로 엄정한 처벌이 불가피함을 강조했다. afer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