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연휴에 나온 뉴스 중 가장 마음이 아팠던 건 경남 거제에서 발생한 일가족 5명의 사망 소식이었다. 경찰 조사가 끝난 건 아니지만 대출 등의 원인으로 생활고에 지친 30대의 젊은 가장이 아이 셋과 아내를 죽이고 자신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인다.
또 강원도 춘천에서는 우울증을 앓아 온 60대 남성이 원룸 방안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현장에서 유서가 발견됐고, 수면제를 과다 복용했다고 한다.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게 자살 소식이지만 어느 때보다 즐거워야 할 명절이라는 점에서 그 씁쓸함은 더 할 수밖에 없다.
왜 명절에 자살을 많이 할까?
그 이유는 바로 가족과 고향생각 때문이다. 가족과 고향은 ‘인정받고’ 싶은 대상이자 장소이다. 하지만 인정받기 가장 힘든 게 가족과 고향이다. 있는 그대로가 아닌 더 큰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이 생각의 간격을 두면서 거리가 생긴다. 그 공간에 욕심이 들어가 앉게 된다.
앉아있는 욕심에게 가족들이 다가가 위안과 인정을 충분히 해주면 다행이지만 반대로 절망감을 느끼게 하거나 스스로 소외감을 느낀다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웃고 있는 사람이 더 힘들까, 웃지 않는 사람이 더 힘들까?
심리학 용어 중에 스마일마스크증후군이라고 있다. 이것은 가면성 우울증이라고도 한다. 명절 때 오랜만에 만나는 부모님이나 형제자매들에게 경제적 혹은 심리적인 어려움을 숨기고 아무렇지도 않게 웃는 것은 더욱 내면의 고통을 키우는 꼴이 된다. 절벽에 서서 웃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가족들 앞에서는 아빠가면 엄마가면 등 자신을 숨기고 있는 모든 가면을 벗고 울고 웃으면 서로를 위로하고 인정해주는 시간을 가져야 내면의 우울증이 회복된다.
상담을 하다보면 대부분의 자녀들은 “우리 아버지는 강한 분이에요. 우리 어머니는 절대 약한 분이 아니에요”라고 말한다. 하지만 부모님들은 이렇게 말한다.
“자식들 걱정할까봐 말하기가 무서워요.”
심리학에서는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을 구분한다.
남을 통해 내가 행복해 지려고 하는 마음은 ‘좋아하는 것’이고 나를 통해 남을 행복하게 만들고 싶어하는 마음은 ‘사랑하는 것’으로 구별한다.
부모가 자식을 낳는 순간에는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마음이 하나로 붙어있다. 아이(남) 때문에 내가(부모) 행복하고 또 나로(부모)인해 아이가 행복해지길 원한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두 가지 마음은 분리된다. 그 이유는 ‘비교’를 하면서 ‘나’와 ‘남’으로 구분하기 때문이다. 구분하는 것은 공격할 대상이 생긴 것이다. 하나일 때는 싸울 일이 없다. 둘이 있으면 늘 싸우게 된다.
아이는 자라면서 부모가 좋아할 때랑 사랑할 때의 태도를 그대로 학습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성인이 되고나서는 그 시스템에 중독 돼 있다. 좋아하는 것의 반대인 싫어하는 개념도 가지게 된다. 사랑하는 것의 반대인 증오하는 것도 가지게 된다.
자신이 싫어지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남을 통해 더 이상 행복해지지 않은 상태일 때다. 자신을 증오하는 것은 나 때문에 남이 불행해진다고 느끼는 상태이다. 문제는 자기 자신이 싫어지면서 동시에 증오스러울 때 ‘자살’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명절자살’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마음속에는 무시와 과시라는 무늬가 있다. 무시(無視)는 안보는 것이다. 과시(誇示)는 말을 크게 하다 보니 충분히 못 보는 것을 말한다.
충분히 봐야한다. 그래야 진심과 진실을 알게 된다. 충분히 보지 않고 말을 크게 하면 이 또한 안보는 것과 같다. 명절에 가족들끼리 충분히 서로를 봐야한다. 눈을 보고 생각을 보고 마음을 봐야한다. 솔직하게 봐야한다. 명절은 지나간 시간을 정리하는 날이 아니라 지나친 마음을 정리하는 날이어야 한다.
이재연 대신대학원대학교 상담심리치료학 교수
정리=김현섭 기자 afer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