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1994년쯤으로 기억합니다. 중학생이던 시절 SBS에서 (무슨 요일인지는 기억이 잘 안 납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밤 11시쯤에 ‘NBA 농구(이것도 정확하진 않습니다만)’라는 프로그램을 했습니다. 지난 경기를 선별해 보여주는 녹화중계 방식이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국내 방송사에서 캐스터와 해설위원의 진행으로 NBA(미국프로농구)를 보여주는 건 이 프로그램이 최초였습니다.
‘농구대잔치’만 보면서 이충희와 허재의 3점슛이 제일 멋있는 줄 알았던 우리에게 NBA는 그야말로 ‘신세계’였습니다. 한국농구를 폄하하는 건 절대 아닙니다만, 어린 마음에 ‘우리가 지금까지 본 농구는 가짜였구나’라는 생각을 할 정도였으니까요. 농구의 매력에 푹 빠진 저와 친구들은 어느 순간부터인가 쉬는 시간이 되면 축구공은 내치고 농구공을 잡고 운동장으로 향했습니다.
당시 SBS를 통해 보던 주요 선수들은 마이클 조던, 찰스 바클리, 스코티 피펜, 데이비드 로빈슨, 레지 밀러, 로버트 페리쉬, 샤킬 오닐, 패트릭 유잉 등이었습니다.
그런데 선수들의 플레이 외에 또다른 재미를 선사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이 프로그램의 해설위원으로 매주 출연한 고(故) 한창도씨였습니다. 그땐 이화여대 감독으로 소개됐던 걸로 기억합니다.
고인은 선수들의 이름을 말할 때 속된 표현으로 ‘혀를 상당히 굴리셨습니다.’ 마이클 조던을 굳이 “마이클 졸(쫄)던”으로, 데이비드 로빈슨을 “데이빗 롸빈슨”이라고 했습니다.
고인 만의 ‘본토 발음’은 늘 화제였습니다. 다음 날이 되면 친구들끼리 모여 앉아 전날 밤 본 NBA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경기 이야기는 ‘화제 2순위’였습니다. 1순위는 한창도 위원이었습니다. 모여 앉아 그 특유의 발음을 따라하고 “비슷하지 않냐?” 이러면서, 속된 말로 ‘발음이 후진’ 친구에겐 “어제 한창도 발음하는 거 못 들었어?” 이러면서 웃음꽃을 피우곤 했습니다. 서당의 인자한 훈장님 같은 인상을 하고 영어 발음은 그렇게 하니 더 재미있었던 같습니다.
그땐 어렸기 때문에 잘 몰랐지만, 지금 떠올려보면 고인은 NBA ‘박사 중의 박사’였습니다. 해설을 할 때마다 해당 경기·선수와 관련한 역사나 뒷이야기가 술술 나왔습니다. 지금처럼 인터넷이란 게 없던 시절이었기에 ‘배경지식’이 전혀 없고 찾기도 어려웠지만, 고인의 해박한 지식으로 무장한 ‘명품 해설’이 있었기에 NBA에 금방 빠져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확산된 농구 열풍은 한국 프로농구 탄생의 물꼬를 텄다고 단언합니다.
미국 홈관중들이 “Defense!(수비해!)”를 연호하는 것(농구대잔치에선 볼 수 없었던)에 대해 “관중들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관중들이 화려한 공격에만 심취하는 것이 아니라 농구에서 ‘수비’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는 걸 높이 평가한 거죠. “Defense!”는 이제 한국 프로농구에서도 매 경기 볼 수 있는 장면이 됐습니다.
전 지금도 누가 1994년에 방영됐던 MBC 드라마 ‘마지막 승부’가 국내 청소년들의 농구붐을 몰고 왔다고 하면 고개를 가로 저으며 “넌 잘못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보다 1~2년 전에 SBS에서 NBA 농구를 보여줬기 때문에 청소년들이 농구공을 잡기 시작했고, 마지막 승부는 오히려 이미 들끓기 시작한 농구붐의 덕을 봤다고 주장합니다.
고인은 이처럼 30대 중반인 제게 사춘기 시절 추억의 한 축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당시 SBS의 NBA 농구가 그리 오래하진 않았기 때문에 20대 정도만 돼도 고인을 잘 모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NBA 플레이오프를 생중계하는 시대가 되기까지 국내 1호 NBA 해설가 한창도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는 걸 꼭 전하고 싶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afero@kmib.co.kr
[쿠키영상] “피쉭~!” 타이어 바람 빠지는 소리 덕에 목숨 구한 버팔로
[쿠키영상] “난 영웅이 아녜요!” 불속으로 뛰어들어 노인 구한 용감한 의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