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사 스토리] 신한금융그룹, 어두운 과거 딛고 리딩뱅크 아성 굳혀

[금융사 스토리] 신한금융그룹, 어두운 과거 딛고 리딩뱅크 아성 굳혀

기사승인 2017-01-23 11:21:13

[쿠키뉴스=김태구 기자] 신한금융그룹은 금융지주를 포함해 신한은행, 신한카드, 신한금융투자 등 39개 계열사를 보유한 국내 대표 금융사다. 은행과 신용카드부문 선두를 달리고 있는 국내 1위 금융사로 평가받고 있다.

신한금융은 1982년 신한은행을 모태로 출범한 이래 지속적인 혁신과 도약을 이뤘다. 2001년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한 후 2003년 자산규모 국내 2위 대형 금융그룹으로 도약했다. 이후 2008년 세계 금융위기(리먼사태), 신한사태 내분 등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철저한 리스크 관리와 차별화된 영업 전략으로 국내 대표금융그룹이란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일제 앞잡이 매판자본… 어두운 과거 품다

신한금융의 시초는 국내 최초 민간상업은행 한성은행으로부터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주력 계열사인 신한은행이 2006년 조흥은행과 합병으로 재탄생했기 때문이다. 신한금융은 자칫 어두운 과거로 치부될 수 있는 것을 감수하고도 국내 민간은행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조흥은행의 전신은 국내 최초 민간상업은행인 한성은행으로 1897년 설립돼, 일본강점기 국부를 수탈하던 대표적인 친일 매판자본으로 꼽힌다. 설립자 김종한뿐만 아니라 당시 은행장을 역임했던 이윤용, 한상룡 등은 을사5적 가운데 한명인 이완용계 친일 반민족 세력이다. 

1922년부터는 일본인들이 경영에 직접 참여했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한국인들의 배척과 비난의 대상으로 지목돼 예금이 일시에 모두 인출되는 사건을 겪기도 했다.

한성은행은 1943년 10월 동일은행을 합병해 조흥은행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해방이후 조흥은행은 1956년 3월 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했다. 1997년 IMF구제금융 사태 때에는 공적자금을 투입 받아 퇴출을 면했다. 1999년에는 충북은행과 강원은행을 합병했다. 

조흥은행은 2002년 정부의 공적자금 회수 방안의 일환으로 신한금융지주에 매각·편입됐다. 신한은행은 2006년 4월 조흥은행을 합병하고 현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민족자본으로 재탄생

신한금융지주의 또 다른 시작은 1982년 (구)신한은행 설립 시점이다. 신한은행은 1982년 오사카지역을 중심으로 한 재일교포들(한국국적) 1200여명이 출자해 만들어 졌다. 

개별 지분으로 따지만 1% 넘지 않는 개미주주들이 신한은행의 창립 주체이며, 이희건 회장과 김재익 등 재일교포 기업인이 핵심 설립자들이다. 재일교포는 지금까지도 약 20%의 지분으로 신한금융지주의 최대주주 역할을 하고 있다. 신한은행 설립 당시 재일교포들은 엔화반출을 규제하던 일본 당국을 피해 설립자금을 가방에 넣어 한국으로 들여와 거액을 출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설립 당시 점포가 3곳에 불과했으나 이후 성장을 거듭해 1986년 총수신 1조원, 1990년 총 수신 4조원을 넘어섰다. 1997년에는 국내 은행 중 최단기간 수신액 25조원을 달성하는 기록을 수립하기도 했다. 2004년 말 국내외 382개 지점을 운영하는 금융사로 성장했다. 

신한금융이 은행에서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한 때는 2001년이다. 이듬해 신한금융은 공적자금으로 연명하던 조흥은행을 인수했다. 100년 넘게 친일 매판자본에 잠식됐던 국내 최초 민간은행이 민족은행으로 재탄생하게 되는 전환점을 맞게 된 셈이다. 

리딩 금융으로 도약

신한금융그룹은 2001년 은행 중심에서 지주회사체제로 전환한 후 급격한 성장을 이뤘다. 2001년 2000억원대던 연간 순이익은 2004년 1조원을 돌파했다. 이후 2008년 리만 사태로 성장세가 잠시 주춤했지만 2011년에는 국내 금융업계 최초로 당기순이익 3조 원을 달성했다. 

지난해 추정 실적은 2조6000억원대로 뒤를 쫓고 있는 KB금융지주(약 2조300억원)보다 3000억원 정도 많다. 중요한 주식투자 지표인 주가순자산비율(PBR)에서도 0.73으로 국내 금융지주 가운데 가장 높다. 그만큼 주식시장에서 투자자들이 신한금융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의미다. 신한금융의 자산 규모도 지난해 9월 말 연결기준 398조원으로 국내 1, 2위를 다투는 수준이다.

이같은 성장에는 인수·합병을 통한 고객 기반과 채널 확대 전략이 주효했다. 신한금융은 지주회사체제 전환 이후 2002년 조흥은행 인수, 2007년 LG카드 흡수, 2013년 예한별저축은행 합병 등 주요 인수·합병건을 성공시켰다. 

이를 통해 지난해 6월말 기준 907개(제주은행 37개 포함) 은행 지점을 가진 대형 금융사로 성장했다. 신한카드도 국내 브랜드 평판에서 1위를 달리고 있으며 지난해 기준 시장점유율 선두를 유지하고 있다. 또한 일본 등 해외 지점 27곳을 보유하고 있다. 최근에는 미얀마, 인도네시아, 베트남, 카자흐스탄 등 해외 진출을 통한 사업 영토 확대에도 나서고 있다.

시련의 시기…신한사태·전산망 마비

이런 신한금융에도 시련은 있었다. 소위 신한사태로 불리는 2010년 경영진 간의 갈등과 2013년 전산 마비 사태 등이다. 

우선 국내외 금융권을 흔들었던 신한사태의 발단은 2010년 9월 2일 당시 라응찬 신한금융지주 회장과 이백순 신한은행장이 주도해 신상훈 신한금융지주 사장을 950억원에 이르는 부당대출(배임)과 횡령혐의로 고소하면서다. 이는 라 회장이 신 사장을 배제하고 이 은행장에게 후계를 넘겨주기 위한 포석으로 해석됐다. 

이후 시민단체가 라응찬 회장을 금융실명제법 위반(차명계좌)으로 고발했다. 또한 재일교포 주주 4명도 회사 신임도를 떨어뜨리고 주주 및 회사에 손실을 입혔다는 이유로 이 행장의 직무집행 정지 가처분 신청과 해임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이로 인해 당시 라응찬 회장 등 핵심 경영진 3명이 모두 검찰 수사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양측의 폭로전이 이어졌다. 경영진, 임직원, 노조, 주주(사외이사)까지 그룹 전체가 사분오열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결국 신한사태는 관련 책임을 지고 라 회장 등 3명의 경영진이 모두 사퇴하면서 일단락됐다.

신한사태는 금융당국으로부터 CEO임금이 타업종보다 과도한 점, 장기 연임 가능한 구조, 형식적인 사회이사 등을 지적받으며 금융지주 지배구조의 문제점을 드러냈다. 또한 금융회사 지배구조 개선 방안 도입에 단초를 제공했다. 

2013년에는 ‘3.22 전산 마비 사태’ 당시 적절한 대처를 못하면서 서진원 행장과 한동우 금융지주 회장이 사과하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전산사고 누락 보고로 금융감독원의 제재를 받았다.

미래 향하는 금융

이런 악재 속에서도 신한금융그룹은 여전히 국내 최고 수준의 재무건전성과 수익 구조를 갖춘 곳이다. 또한 신한사태 이후 서진원 은행장, 한동우 회장 체제를 거치면서 조직의 화합을 이뤄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동우 신한금융그룹 회장은 신년사를 통해 미래를 향한 신한금융의 길을 제시했다. 디지털 시대에 맞는 새로운 차별성 확보, 고객 중심 하나의 신한 가치 창출, 미래를 위한 자원 재배치, 변화의 본질을 읽은 리스크 관리, 해외진출 및 현지화 강화 등이 강조한 사항이다. 특히 디지털 전략 강화와 그룹 시너지 확대에 초점을 맞췄다. 

한동우 신한금융 회장은 “환경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 많은 것을 바꾸고 혁신해야 하지만 그 중심에 있는 가치가 바뀌어서는 안된다”며 “신한의 미션이자 존재 이유인 ‘미래를 함께하는 따뜻한 금융’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기며 신한과 함께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용병 신한은행장(신한금융 차기 회장 내정자)도 “혁신, 공감, 행복, 동행의 4가지 키워드를 늘 염두에 두고 도전해야 한다”며 “새로운 도전을 통해 고객의 가치가 커질수록 신한의 가치도 커지고 나아가 더 좋은 사회가 만들어지는 상생의 선순환, 그것이 신한이 추구하는 궁극의 지향점인, 미래를 함께 하는 따뜻한 금융”이라고 강조했다. 

ktae9@kukinews.com
김태구 기자
ktae9@kukinews.com
김태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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