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이다니엘 기자] 헌법재판소가 10일 오전 재판관 8인 만장일치 의견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인용했다. 탄핵의 시발점이 된 ‘최순실 게이트’의 중심부에 있는 체육계 권력형 비리가 이번 인용으로 개혁을 맞을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헌재 “박 대통령, 체육단체 설립 과정에서 지위·권한 남용”
체육인들은 이번 인용이 국내 스포츠계를 얼룩지게 한 묵은 때를 걷어내는 계기가 되리라 기대하고 있다. 최순실 게이트 중심부에 스포츠 권력비리가 있고, 이에서 갖은 정경유착이 파생됐기 때문이다.
쿠키뉴스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 70% 이상이 인용을 찬성할 정도로 박 전 대통령의 탄핵은 정치권뿐 아니라 사회적 공감을 두루 얻는 사안이었다. 헌재는 11일 “피청구인(박근혜 전 대통령)의 법 위배행위가 헌법질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과 파급효과가 중대하므로, 피청구인을 파면함으로써 얻는 헌법 수호의 이익이 압도적으로 크다고 할 것이다. 재판관 전원의 일치된 의견으로 주문을 선고한다.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고 밝혔다.
헌재는 대통령 지위 및 권한 남용, 헌법·국가공무원법·공직자윤리법 위반, 기업의 재산권 및 경영 자유 침해, 비밀엄수의무를 위배 등을 탄핵사유로 지적했다.
헌재는 “피청구인은 안종범에게 문화와 체육 관련 재단법인을 설립하라는 지시를 하여, 대기업들로부터 486억 원을 출연 받아 재단법인 미르, 288억 원을 출연 받아 재단법인 케이스포츠를 설립하게 했다”고 인정했다.
또한 “최서원은 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 김종을 통해 지역 스포츠클럽 전면 개편에 대한 문화체육관광부 내부 문건을 전달받아, 케이스포츠가 이에 관여하여 더블루케이가 이득을 취할 방안을 마련했다. 그리고 피청구인은 롯데그룹 회장을 독대하여 5대 거점 체육인재 육성 사업과 관련해 하남시에 체육시설을 건립하려고 하니 자금을 지원해 달라고 요구하여 롯데가 케이스포츠에 70억 원을 송금케 했다”고 밝혔다.
▲최순실, 김종 전 차관 종용해 이권 행사
박근혜 대통령의 비선실세로 나라를 쥐락펴락한 최순실씨는 ‘스포츠 대통령’으로 통하는 김종 전 문체부 차관을 꼭두각시 인형 부리듯 조종해 평창동계올림픽을 비롯한 각종 스포츠 사업 및 행사, 인사권을 주물렀다.
대기업들은 수상한 사조직 K스포츠재단에 수백억 원의 자금을 출연하고, 김 전 차관은 최씨의 사주를 받고 하수인 노릇을 했다. 최순실씨의 조카인 장시호가 쥐고 흔든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에 정부 예산이 무분별하게 흘러 들어갔는데, 최씨의 딸 정유라는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판정상 특혜를 받은 데 이어 대한승마협회와 삼성을 통해 2020년 도쿄 올림픽 출전을 위한 청탁도 추진했다.
지난 2014년 문화체육관광부가 스포츠 4대악 척결을 목표로 만든 ‘스포츠 4대악 신고센터’조차 권력형 비리의 산실로 밝혀져 충격을 줬다. 당시 문체부는 승부조작과 성폭력, 입시비리, 조직사유화 등 체육계의 부정부패를 없애기 위해 해당 신고센터를 설립했다고 했으나, 여기에 최순실의 입김이 작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신고센터의 발단은 2013년 4월 최씨 딸 정유라가 전국승마대회에서 부진한 성적을 거두면서다. 최씨는 판정에 문제가 있다며 대통령에게 민원을 제기했고, 이것이 승마협회에 대한 특별감사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죄 없는 인물들이 퇴직하는 촌극이 벌어졌다.
▲실력과 무관한 선발기준… 스포츠맨십 저해
스포츠의 기본 원칙은 ‘공정’이다. 땀과 노력으로 맺어진 실력만이 스포츠의 미덕이 되기에 마땅하다. 그러나 국내 체육계는 각종 비리와 인맥질로 얼룩져 정작 인정받아야 할 이들에게 포기가 강요됐다.
김 전 차관은 지난해 리우 올림픽 전 박태환씨를 만나 올림픽 출전 포기를 종용했다. 당시 김 전 차관은 “올림픽에 출전하지 않는 대신 김연아처럼 후배들 멘토로 나서 기업 후원을 알아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유하면서 “나는 김연아를 참 안 좋아한다”고 말했다.
박태환은 지난해 4월 광주 남부대 국제수영장에서 열린 제88회 동아수영대회 남자 일반부에서 100m, 200m, 400m, 1500m를 모두 석권하며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다. 이 대회는 국가대표 2차 선발전을 겸한 대회로, 박태환은 네 종목에서 올림픽 A 기록기준을 가볍게 통과했다. 국내에서 단연 가장 좋은 성적이었다.
하지만 김 전 차관에겐 ‘다른 평가기준’이 있었다. 그는 박태환에게 올림픽에 나가지 말라면서 차라리 기업 후원이나 찾아보라고 조롱했다. 아울러 “이 사실을 절대로 이야기하지 말라”고 당부한 데 이어 “유승민은 흠이 있어서 IOC 위원이 될지 모르겠다. 그리고 안현수가 금메달 따서 러시아에서 인정을 받았겠나? 걔는 그냥 메달을 땄을 뿐”이라고 깎아내렸다.
유승민은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중국의 철옹산성 같은 벽을 넘으며 금메달을 따낸 국민 영웅이다. 안현수의 경우 동계올림픽과 세계선수권에서 압도적인 성적을 거두다가 계파갈등에 치여 러시아로 귀화했다. 귀화 전까지 슬럼프를 겪던 그는 러시아 귀국 후 참여한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2관왕에 올랐다. 우리나라 국민은 그가 국내에서 겪은 고충을 아는 터라 ‘배신자’보다는 ‘인간승리’의 대상으로 선망의 눈빛을 보냈다.
스포츠 선수가 흘린 땀방울은 박수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김 전 차관은 그들을 그저 발치에 놓인 하수인 부리듯 거침없이 발언했다. 그의 언급은 실력 위주의 선수선발 기준을 부정할 뿐 아니라 선수들의 스포츠맨십을 짓밟는 태도였다.
피겨여왕 김연아는 대한체육회가 선정하는 2015년 스포츠영웅 투표에서 12명 후보 중 80%가 넘는 지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최종심사에서 연령 제한의 석연찮은 이유로 탈락했다. 이 사실이 밝혀진 뒤 팬들의 비난이 거세지자 2016년 스포츠영웅에 김연아가 선정됐다. 썩 내키지 않는 과정이었다.
오직 연습에 몰입한 선수들의 안타까운 좌절은 최순실의 딸 최유라가 대학에서 모셔간 것과 대조된다.
dn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