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경기] 프로게임계가 낳은 ‘슈퍼스타’

[그때 그 경기] 프로게임계가 낳은 ‘슈퍼스타’

기사승인 2017-04-14 11:40:26

스타크래프트 브루드워가 더 위대해져서 돌아온다.

지난달 26일 스타크래프트 20주년을 기념한 블리자드 행사 ‘I <3 StarCraft’에서 마이크 모하임 블리자드 CEO는 “과거와 현대가 만나게 됐다”면서 리마스터 프로젝트를 공개했다. 이번 리마스터링에서는 4K UHD 해상도 지원을 골자로 고음질 오리지널 오디오 추가, 한국어 지원, 배틀넷 인터페이스 개선 등 지금껏 블리자드가 쌓아온 기술집약적인 노하우가 고스란히 담길 것으로 기대된다.

브루드워 하면 ‘보는 재미’를 빼놓을 수 없다. e스포츠의 아버지로 일컫는 신주영과 이기석, 그리고 황제로 군림한 임요환까지. 스타크래프트는 e스포츠의 기원이라 할 만큼 큰 인기를 구가했다. ‘나 만큼 미쳐봐’라 자신한 한 프로게이머의 열정은 국제적으로 가파른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는 e스포츠의 기초가 됐다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스타크래프트 리마스터링을 기념해 브루드워 명경기를 다시 짚어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편집자 주>

[쿠키뉴스=이다니엘 기자] 스타크래프트는 스타플레이어가 있다. ‘콩라인’ ‘O나쌩(O 나오면 쌩큐)’ ‘등짝 좀 보자’ ‘이영호면 모른다’ 등의 유행어에서 보듯 e스포츠계의 팬덤은 상당부분 선수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임요환, 홍진호, 기욤 패트리 등 이제는 방송인으로 더 잘 알려진 그들은 훤칠한 외모만큼이나 번뜩이는 플레이로 팬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전략전술, 그리고 별난 콘셉트의 플레이스타일은 e스포츠 성장의 동력이 됐다.

▲“베르뜨랑 선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죠”

e스포츠의 가능성을 연 개척자이자 선구자인 임요환은 불모지에 있던 테란을 양지로 인도했다. 1999년 12월 커리어를 시작한 그는 테란으로 갖가지 전술을 만들며 대회를 휩쓸었다. 2001 한빛소프트배 스타리그 로열로더(첫 대회 우승)로 스타트를 끊은 그는 차기대회인 2001 코카콜라배 스타리그마저 재패하며 데뷔 후 2회 연속 우승이라는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작성했다.

때론 개발자나 맵 제작자를 당혹케 한 그의 발상은 남달랐다. ‘드랍십 견제’ ‘바카닉’ ‘얼라이마인’ 등은 그의 대표적인 변칙 플레이다. 얼라이마인의 경우 게임 외적 요소로 판단, 대회에서 금지판정을 받았지만, 임요환이 전략가로서 얼마큼 창조적인 생각을 해내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전술 이해도가 높은 임요환에게 신맵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최적화 내지는 정형화로 축약되는 일반적인 연습방식과 달리 그는 연구를 통해 새로움을 창출했고, 이는 곧 좋은 성적으로 연결됐다.

대표적인 ‘발상의 전환’은 베르트랑과의 경기에서다. 2002 파나소닉 스타리그 8강 A조 1경기, 네오 비프로스트에서 임요환은 통상적으로 테란들이 뒤쪽으로 통하는 입구에 건물을 짓는 것을 역이용해 나머지 길목을 건물로 차단하는 ‘백도어 벙커러시’를 감행했다.

경기가 안 풀릴 때 표정을 찡그리는 것으로 유명한 ‘처절테란’ 베르트랑은 이날 경기에서 카메라에 모습이 잡힐 때마다 연신 인상을 썼고, 마지막 탱크 1기를 잃은 순간 감탄사 ‘Ciel(신이시여)’를 되뇌며 ‘GG’를 선언했다. 임요환의 탁월한 기지를 엿볼 수 있는 한판이었다.

▲735일 뒤에도 건재했던 클래스

홍진호는 브루드워 최고의 스타이자 레전드이나 동시에 준우승의 아이콘이기도 하다. 그는 2000년대 초중반 저그의 독보적인 최강자로 이름을 호령했지만 중요한 경기에서 임요환, 박정석, 이윤열, 최연성 등에게 패하며 ‘무관의 제왕’이란 오명을 썼다. 이정훈, 어윤수 등 준우승으로 커리어를 도배한 이들이 강제 가입한 클럽인 ‘콩라인(홍라인 발음의 변형)’은 바로 홍진호의 결승전 징크스에서 비롯됐다.

‘폭풍저그’란 명칭답게 한 방에 몰아치는 전략을 구사한 그는 우승 커리어가 없음에도 많은 팬을 보유했다. 선수로 치면 하향곡선을 그릴 나이에도 그는 특유의 가난한 경기운영으로 멋진 장면을 자주 연출했다.

비바람이 유난스럽게 몰아친 2009년 6월20일, 공군 에이스 소속으로 군 복무를 하던 홍진호는 저그전 스페셜리스트 김택용(전 SK텔레콤 T1)을 만났다. 대 저그전 22승4패의 압도적인 승률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김택용은 당시 국내 프로게이머 랭킹 2위에 올라있었다.

홍진호는 735일간 공식전 승리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클래스는 영원했다. 빌드오더 페이크로 상대를 완벽히 속인 홍진호는 속칭 ‘3센티 드랍’으로 김택용의 본진에 병력을 몰아쳤다. 김택용은 다수의 포토 캐논과 리버 2기로 만반의 준비를 했지만, 멈추지 않는 폭풍에 주요 건물을 내줘야했다.

비록 이날 홍진호 소속팀은 패배했지만, 2여년만의 1승은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클래식한 경기운영으로 완성된 전술을 깨뜨린 것을 놓고 팬들은 “클래스는 영원하다”며 추켜세웠다.

▲“저그전이요? 배틀크루저로 이기죠”

‘브라끄’ 이성은은 세레머니왕이다. 숱한 프로게이머가 독특한 세레머니로 주목받으려 애썼지만, 이성은에겐 한 수 접어야했다. 종전에 없던 유별난 퍼포먼스로 톡톡 튀었던 그는 바야흐로 팬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됐다.

이성은은 스케일이 큰 경기를 선호해 ‘블록버스터 테란’으로도 불렸다. 때론 경기를 질질 끈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단 한 번의 경기로 그러한 평가는 완전히 뒤집어졌다.

이성은은 2007 곰TV MSL 시즌2 8강에서 6회 연속 4강 진출을 노리는 마재윤(당시 CJ엔투스, 현재 영구제명)을 만났다. 강력한 우승후보였기에 마재윤의 우세가 점쳐진 대전이었지만, 이성은은 주눅 들지 않았다. 파이썬에서 치러진 1세트 경기에서 그는 스타크래프트 역사상 가장 큰 그림을 그린다.

1시에서 시작한 이성은은 바이오닉 체제로 시작했지만 규모싸움에서 밀려 본진 건물이 모두 파괴되고 만다. 소수 탱크를 이끌고 7시 쪽에 어렵사리 새 거점을 마련한 그는 끈덕진 수비로 버티며 자원을 쌓아나간다. 이후 배틀크루저, 고스트, 그리고 메딕의 리스토레이션까지 활용하며 역사에 남을 대역전승을 성사시킨다.

이날 이성은은 1세트 대역전승을 토대로 세트스코어 3대2 승리를 거뒀다. 개인 첫 4강의 쾌거를 ‘마에스트로’를 상대로 성사시킨 것. 이성은은 이 기쁨을 특유의 저돌적인 세레머니로 표출한다.

이성은은 현역시절 유독 마재윤에게 과한 세레머니를 하며 뜨거운 논쟁을 유발했다. 그러나 이후 마재윤의 조작행위가 드러나며 까무잡잡한 피부색과 스타판을 구하기 위해 열사활동을 했다는 의미로 ‘흑열사’란 별칭이 붙었다.

▲“아 팀이 0대3으로 지고 있는데 웃고 있어요”

이영호는 스타크래프트 역사상 가장 완벽한 선수로 통한다. 상향평준화된 e스포츠판에 발을 디딘 그는 양대리그 6회 우승 및 2회 준우승, 역대 승률 1위, 프로리그 10시즌 연속 두 자릿수 승수 등으로 독보적인 커리어를 쌓았다. 

이영호는 소속팀 KT 롤스터에서 ‘소년가장’ 혹은 ‘최종병기’로 불렸다. 팀이 부진을 면치 못한 순간에도 비일비재하게 팀을 위기에서 구했기 때문이다.

이영호의 무지막지한 경기력은 09-10시즌 프로리그 통신사라이벌전에서 절정에 달했다. 팀이 0대3으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출전한 그는 웃고 있었다. 해설위원은 의아해했지만, 그 이유는 경기시간 기준 40분만에 증명됐다. 

이날 이영호는 박재혁, 김택용, 정명훈, 도재욱 등 당대 최고의 선수를 연달아 격파하며 4대3 역스윕을 달성했다. ‘이영호 대 SKT’란 제목으로 세계적으로 화제가 된 이 경기는 이영호 커리어상 최고의 활약으로 평가받고 있다.

dne@kukinews.com

이다니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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