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전북=고민형 기자] 울산과 군산에서 조선업계 물량팀장으로만 10여년을 일 했다는 E씨(43).
조선업계 베테랑인 그는 지금 ‘횡령’과 ‘횡령 미수’라는 황당한 덤터기를 쓴 채 수사당국의 조사를 받고 있다.
그리고 그에게 남은 건 ‘날려버린 집’과 ‘2억2000여만 원의 채무’, ‘풍비박산 난 가족’ 등 처참한 현실뿐이다.
그가 흘리는 눈물 속 회한을 들여다본다.
울산조선소 등에서 일을 하고 있던 E씨는 2010년 2월 군산조선소가 문을 열면서 협력업체를 따라 군산으로 넘어왔다.
호황을 누렸던 초반만 해도 일감이 끊이질 않아 몸은 힘들어도 그럭저럭 먹고 살만은 했다.
그런 그에게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한 건 3년 남짓 된 조선업 불황기가 시작되면서부터다.
그는 "회사(협력업체)가 나에게 ‘개인사업자를 내고 인부를 데려와라. 그러면 일당 얼마씩을 쳐주고, 4대 보험과 숙소비 일부를 지원해주겠다’"면서 "다만 사업자는 회사 내부사람 명의로 내면 안 되니 가족 이름으로 내야한다"고 회고했다.
세금과 보험료 등을 내지 않기 위한 협력업체의 고육이었던 것.
그는 협력업체 말대로 가족 이름의 개인사업자를 내고 자기 팀으로 인부들을 데려와 일을 진행했다.
하지만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문서 계약이 아닌 ‘구두계약’으로 진행됐던 것이 그 인생을 옭매는 올가미임을 나중에야 알게 됐다.
현대중공업이 휘청이면서 예산이 줄어드는 상황이 반복되고, 급기야 군산조선소가 폐쇄되는 지경까지 이르는 동안 돈 가뭄이 지속되자 회사 태도가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회사가 그에게 건넨 인건비와 4대 보험료, 숙소비 등 ‘입금 내역’이 ‘회삿 돈 횡령 자료’로 둔갑됐다.
물론 자신과 팀원들 인건비도 받지 못함은 물론이다.
군산조선소가 문을 닫자 팀원들 인건비는 자신이 어렵게 마련해 건넸지만, 그에게는 체불임금 1억5,000여만 원, 부가세 2달 분 2000여만 원 등 총 2억2000만원의 빚만 지게 됐다.
사업자 명의가 가족으로 돼 있다 보니 가족 들 앞으로 각종 고지서가 날아든 데다 횡령혐의까지 엎친데 덮친 악몽을 꾸고 있다.
그는 현재 모처에서 막장일을 하고 있다.
E씨는 "예전엔 울산이나 군산에서도 4대 보험료를 내지 않고 일을 해 왔다"면서 "그런데 2~3년 전부터 회사가 사업자를 요구하더니 지금은 나에게 건넸던 금액들이 ‘횡령’이란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가족들도 망가지고 있다. 구두계약(하도급계약)으로 진행했던 것이 천추의 한"이라고 울먹였다.
(3)기형적 인력구조인 불법 ‘물량팀’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의 작업 구조는 크게 현대중공업-협력업체-물량팀장-물량팀원으로 이뤄졌다.
군산조선소 내에는 총 53개의 현대중공업 1차 협력업체가 ‘사내협력사’로 있었다.
이들 업체들은 가공소조와 판넬조립, 건조, 도장, 생산지원, 품질 경영 등의 파트를 담당하고 있다.
A협력업체의 경우는 용접1・2반 등 5개 팀에 총 49명의 물량팀원이 소속돼 있다.
1개 팀당 평균 10명꼴이다.
53개 협력업체가 평균 40~50명의 물량팀원을 ‘용역’하고 있는 셈이다.
사내협력사 전체적으로 보면 단순 산술적으로 물량팀원은 최소 2000여명에 달한다는 뜻이다.
▲현대중공업 소속 출신이 대부분인 ‘1차 협력업체’
협력업체는 현대중공업에서 오래 근무했지만 승진 등을 하지 못한 ‘현대맨’들이 대부분을 차지했다고 알려진다.
각 협력업체는 현대중공업이 내려 보내는 공정표를 놓고 물량팀장들과 하루 작업량과 소요예산을 협의하고, 팀장들은 팀원들과 함께 해당 공정을 마무리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가 끝이 난다.
협력업체들은 현대중공업의 선시공후계약으로 인한 월말 기성금을 받을 때 골머리를 앓는다.
예산이 삭감됐을 때, 직원들 4대 보험과 퇴직금 적립금 등을 협력업체가 고스란히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일부 불량 협력업체들은 E씨 경우처럼 ‘개인사업자를 낸 물량팀장(재하도급자)’을 끌어들인다.
물량 팀 사용으로 협력업체가 얻는 이익을 월 급여 300만원의 60명 근로자와 예를 들어보면 물량 팀원 60명을 계약한 A협력업체는 4대 보험료(1인당 연간 276만원, 총 1억6000여만 원)와 퇴직금(1인당 연간 300만원, 총 1억8000여만 원)을 내지 않아도 된다.
인력을 직접고용한 회사보다 4대 보험료와 퇴지금만 무려 연간 3억4000여만 원을 절약할 수 있다.
용역 직인 ‘물량팀’을 쓰는 이유다.
▲물량팀장-인력소장
물량팀장은 협력업체에 있으면서 대부분 ‘개인사업자’로 활동하는 이른바 ‘인력사무소’역할을 맡는 사람이다.
협력업체는 이 같은 물량팀장과 '구두계약'또는 ‘단기공사 계약서’라는 ‘재하도급 계약’을 통해 현대중공업이 지시한 공정을 수행하게 된다.
물량 팀 종류는 예산제로 움직이는 물량 팀이 있고 일당을 받는 일급제 물량 팀이 있다.
물량 팀 직원들은 각 분야 숙련자로, 보통 협력업체 직원들보다 능률과 임금이 높지만 협력업체는 직접 고용이 아니어서 4대 보험과 퇴직금 부담을 덜 수 있다.
때문에 일이 없을 경우 언제든 계약해지를 할 수 있는데다 사고가 발생할 경우 책임과 문제는 물량팀원을 고용한 물량팀장에게 귀속된다는 하도급계약서에 도장을 찍는다.
팀원들의 사고 발생 시 적절한 보상이 이뤄질 수 없음은 불보듯 하다.
▲‘최하위’ 물량팀원
물량 팀은 표면상 협력업체 직원으로 입사하지만 협력업체 관리자 지시를 받지 않고 각 물량팀장 지시 하에 특성화된 공정에 투입된다.
‘물량팀’은 대다수가 일용직 근로자들로 조선업계 현장에서 주로 근무한다.
이들은 기본적인 고용 안정성이 담보되지 않는다.
한 번 맡았던 프로젝트가 끝나면, 다른 일감을 찾아 떠나야 하는 이른바 ‘용역’의 개념이 이들을 따라 붙는다.
이런 상황 탓에 실제 현장 ‘물량팀’은 주로 도장이나 용접, 배관, 전기 등 가장 안전사고에 취약한 업무 환경에 노출돼 있다.
용접과 취부 팀원들 하루 일당은 15만원 선.
하지만 현재중공업 자금사정이 여의치 않자 하루 일당이 13만5000원으로 삭감된 적도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회사가 문을 닫았을 때 E 물량팀장 처럼 '의리'있는 팀장을 만났을땐 임금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팀원들이 태반이다.
협력업체와 팀장들이 도산 후 '도망'갔기 때문이란다.
A협력업체 전 B관계자는 “현대중공업이 표면적으로는 물량 팀 사용을 제재한다 하지만 현장에서 일어나는 작업상의 변수로 ‘돌관작업’이라는 명목으로 물량팀 사용을 묵인하고 있다”면서 “(현대중공업이)물량 팀을 사용하면서 얻는 협력업체 이익분에 대한 기성삭감도 있었다”고 털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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