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전남대병원이 발간한 5·18 의료인 증언집 <5·18 10일간의 야전병원>에 수록된 여러 의료인의 증언을 보노라면 분노와 참담함, 고통에 휩싸이곤 한다. 이번에 소개하는 내용 중 “5·18이 끝났지만 여전히 휠체어에 앉은 채였다” 부분에 이르러선 무언가 뜨거운 것이 눈에 맺히고야 만다. 1980년의 전남대병원 의료진의 헌신은 눈물겹다. 흡사 환자를 향한 의사의 태도란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리는 묵직한 종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쿠키뉴스=김양균 기자] 1980년 5월 나는 흉부외과 레지던트 1년차였다. 5월 17일 아내는 본가가 있는 목포로 향했다. 공용버스터미널에서 아내와 처남은 이상한 것을 목격했다. 곤봉을 든 군인 여럿이 사람들을 화장실로 몰아가고 있었다. 아내는 버스를 타고 광주 밖으로 나갔다. 이날이 광주에서 나갈 수 있었던 마지막 날이었다. 이후 광주에서 나가던 모든 교통수단이 끊어졌다.
그리고 5·18이 시작되었다. 전남대병원이 시내와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병원 안에 있어도 바깥 상황의 심각성을 잘 알 수 있었다. 광주MBC가 불에 타는 것도 보았다. 그런데 21일,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발포를 했다. 전남대병원에는 총상 등 크게 다친 환자가 많이 몰렸다.
환자를 눕힐 침대도 턱없이 부족했다. 급한 대로 바닥에 매트리스만 깔아 놓고 환자들을 받았다. 계단이 있는 곳까지 링거를 꽂은 환자들로 꽉 찼다. 그럼에도 질서 정연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살아서 수술을 받은 사람보다 수술 전에 죽은 사람들이 더 많았다. 대부분이 가슴을 정조준 하여 쏜 총에 맞은 사람들이었다. 당시 전남대병원의 수술실 환경은 아주 열악했다. 가슴을 여는 기구는 한 세트뿐이었고 수술장도 몇 개 되지 않았다. 한 번 사용한 기구는 소독기에서 2~3시간 동안 소독을 해야 했다. 하지만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소독 용액에 기구를 20분 정도만 담가 두었다가 다시 꺼내어 사용하는 식으로 수술을 이어갔다.
“총을 맞은 곳이 어디입니까?”
환자들은 제각기 다른 동네 이름을 댔다. 집단 발포가 있었던 도청뿐만 아니라 궁동사거리, 신역, 대인시장 근처 등에서 총상을 입었다는 사람도 있었다. 27일이 되자 20사단이 사방에 총을 쏘며 광주로 들어왔다. 그때 나는 동료의사와 11층 숙소에 있었다. 밖을 내려다보려던 한 선생은 총에 맞을 뻔하기도 했다. 총격이 끝나자 계엄군이 병원으로 들어와 병실을 샅샅이 뒤졌다. 병원 안에 숨어 있는 시민군을 잡기 위해서였다. 병원 외벽은 계엄군이 쏜 총알로 벌집이 되어 있었다.
병원에 실려 온 총상 환자는 어린 여자 아이였다. 아이의 가족들도 총상을 입고 함께 내원했다. 아이의 아버지는 트럭에서 채소 장사를 하는 사람이었다. 5·18로 광주가 아수라장이 되자, 일가족이 처갓집인 담양으로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계엄군들은 광주 밖으로 나서려는 트럭에 총격을 가했다.
아이의 가슴과 척추에 박혀 있던 총알을 내가 꺼내 주었다. 총알이 중요한 장기를 비껴간 덕에 아이는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영영 다리를 쓰지 못하는 불구가 되고 말았다.
하반신 마비 판정을 받은 아이의 나이는 겨우 다섯 살이었다. 어린아이에게까지 총을 쏘았다고 모든 의료진이 분개했다. 불구가 되기엔 너무 어린 나이었다. 시간이 많이 흐른 뒤, 우연히 환자를 다시 보게 되었다. 아이는 어느새 어른이 되어 있었다. 5·18이 끝났지만 여전히 휠체어에 앉은 채였다.
(해당 내용은 전남대병원의 허락을 받아 <5·18 10일간의 야전병원> 중 오봉석 5·18 당시 전남대병원 흉부외과 레지던트 증언 ‘겨우 다섯 살 어린아이에게까지 총을 쏘았다’에서 발췌했습니다.)
*쿠키뉴스-전남대병원의 기획연재 <5·18 시민 곁엔 그들이 있었다>는 다음 스토리펀딩에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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