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쿡기자] 국립대병원 임상교수 구보씨의 하루

[친절한 쿡기자] 국립대병원 임상교수 구보씨의 하루

기사승인 2017-08-03 04:00:00


[쿠키뉴스=김양균 기자] 아내는 남편이 제 방에서 나와 현관 앞에 놓인 구두를 신고 키번호를 눌러 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병원가요?”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현관 앞까지 나간 남편은 이 말을 듣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남편의 대답이 귀에 닿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여하간 두 가지 가능성의 하나라고 생각한 아내는 이번에는 현관 밖 엘리베이터까지 들리도록 소릴 냈다. “오늘은 혼나지 말아요.” 역시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아내는 한숨을 쉬며 스스로를 위한 위로의 말을 중얼거린다. 그이가 오늘은 잘 버텨야 할 텐데. 

아내는 대체 남편이 왜 병원에서 애를 먹는지를 생각해 본다. 국립대병원 임상교수인 남편은 최근 몇 년간 아내의 온갖 근심 걱정거리였다. 새벽 일찍 나간 남편은 새벽녘에 돌아오거나 아예 안 들어오는 날도 많다. 이렇게 일을 해도 남편의 앞날은 어찌될지 알 수 없다. ‘찍히면’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병원에서 잘려나갈 수 있다. 

“참, 당신은 왜 병원이 시키는 대로 환자를 빨리 안 보는 거야.” 언제나 병원 일을 꺼내면 남편은 말했다. “몇 분 안에 어떻게 환자를 보라는 거야.” “하지만 어떻게 방법이 있을 거야. 눈 한번 감고 입 한번 다물면 우리 식구 입에 풀칠이야 못헐라구….” 아내는 이러다 남편이 병원에서 쫓겨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면서도 병원에서 꾸지람을 듣는 남편이 보기에 딱하고 또 답답했다. 

구보는 아파트를 나와 종로통을 향해 걸어가며, 아내에게 ‘응’이라고 대답하지 못한 것을 뉘우쳐 본다. 하기야 현관문이 삐리릭 소리를 내며 잠길 때 구보는 ‘그럴게. 오늘은 병원에서 잘할 테야’라는 말을 목구멍까지 내어 보았던 것이다. 구보는 아내가 시름에 잠길 때의 표정을 눈앞에 그려본다. 병원 앞에서 의대생 서넛이 재잘거리며 웃고 떠들더니 이내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도 저럴 때가 있었나. 멍하니 서서 그 광경을 보던 구보는 마침내 주차장을 지나 병원 입구까지 이르렀다. 그의 부산한 듯 꾸미는 걸음걸이는 그곳에서 잠시 멈추어진다. 

그가 다니는 병원의 과장님이 그의 얼굴을 슬쩍 한번 보고는 말을 건다. 구보는 과장을 보면 저도 모르게 목이 움츠러든다. 오늘은 또 무슨 말을 하려는가. 구보가 꾸벅 인사를 한다. “구선생 환자 컴플레인이 많아. 좀 빨리 보라고.” “네….” “논문은 잘되어가나?” “네….”       

구보는 외래진료를 하기 위해 다시 걷기 시작한다. 한 평 외래진료실에서 우두커니 앉아 1분 진료를 하는 것의 무의미함을 새삼스레 깨닫는다. 다들 그리하니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홀로 선언도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성의껏 환자를 보아도 더 이상 승진과 월급에 변화가 없는 것을 깨닫는다. 구보는 어떠한 사심도 갖지 않겠다고 결심하기 시작한다. 불안한 장래에 그는 병원에서 쫓겨나 개원을 하느라 억대 빚을 지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구보는 ‘이젠 지쳤다’고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지만 집에 있을 아내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이었다. 

포괄수가제 이후 병원 수익이 줄면서 구보는 고달파지기 시작했다. 순천향대병원 이임순 교수처럼 비선의료 실세와 나는 왜 친인척이 아니던가. 한때 구보는 취해 홀로 이런 생각도 해보았다. 밀려드는 환자를 보고 나면 온몸의 뼈가 녹을 듯 아프고 모래를 삼킨 듯 목이 아프지만, 연구실적도 쌓아야 한다. 잠이 모자라 머리는 멍하지만 Sci급 논문을 써야 연구 점수가 늘어난다. 점수를 쌓으면 전임교수의 길에 한걸음 가까워지겠지. 구보는 의과대학과 대학본부 위로 불끈 솟은 상아탑을, 그리고 이곳에서 하얀 의사가운을 계속 입고 싶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다. 최대한 빨리, 더 많은 환자를 보아야 성과급도 늘어난다. 휠체어에 마스크를 쓴 회장님이 간혹 병원을 드나들 때마다 구보는 아버지가 왜 재벌이 아닌지 잠깐 원망도 해보는 것이었다. 

구보는 저 혼자 텅 빈 외래진료실에 앉아 있는 것에 외로움과 애달픔, 해방감을 맛본다. 구보는 내리 달리는 병원에서 홀로 훌쩍 뛰어내리기로 작정해도 그때뿐이었다. 그럼에도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터널 속으로 빨려들 듯 격무와 잡무, 논문, 회식, 피곤에 시달리는 것이었다. 

저녁 7시 외래진료는 벌써 끝났지만, 잡무는 끝이 없다. 과장의 논문도 마저 써야하고, 과의 일도 산더미다. 하릴없이 병원을 나서자 사방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구보는 어디로 갈지 헷갈린다. 구보는 소독약 냄새를 풍기고 서서 텅 빈 공원을 바라본다. 어디 의자에라도 앉아서 쉴까…. 그의 뒤로 빈약한, 너무나 빈약한 옛 의학의 궁전은 구보의 마음을 우울하게 했다.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를 차용했습니다. 

angel@kukinews.com

김양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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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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