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김양균 기자] 5·18 민주화항쟁 당시 외신을 제외하면 국내 언론은 신군부에 눌려 보도를 하지 못했다. 다만, 예외가 있었다. ‘전남도청 독침사건’만큼은 국내언론의 관심 사안이었다. ‘독침에 맞았다’고 주장하는 환자를 진료한 정종길 당시 전남대병원 외과 레지던트는 훗날 “심각한 사건이 아니었는데 왜 이렇게까지 이슈화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이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독침 사건이라는 게 발생하자, 간첩이 침투했다는 소문이 여기저기서 돌고 모두들 수군거리며 ‘불안해서 도청 안에는 더 이상 못 있겠다’고 하면서 일부는 빠져나갔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 이 사건은 미리 계획된 것이었다. 당국에서 침투시킨 정보 요원들이 전개한 도청 교란 작전의 일환이었다.” (2016년 10월 23 <프레시안> ‘북한군 600명? 전두환조차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중에서)
◇ 이상한 조짐
이상한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건 (1980년) 5월 18일부터였다. 공수부대가 사람들에게 곤봉을 휘둘렀다. 곤봉에 맞아 다친 환자들이 계속 병원을 찾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환자들은 주로 머리를 다쳐서 내원했다.
그런데 하루하루 환자들의 손상 패턴이 달라졌다. 19일에는 대검에 부상을 입은 환자들이 들어왔다. 병원 앞에서 대검에 가슴을 찔린 환자도 있었다. 그 이후에는 총상 환자들이 들이닥쳤다. 불과 며칠 사이에 병원은 준전시 상황처럼 변해 버렸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곤봉, 칼, 총에 맞은 환자들이 응급실로 실려 왔다. 모든 의료진이 환자를 보느라 정신없었다.
총상 환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병원은 더 바빠졌다. 중환자들이 계속 실려 들어왔다. 하지만 많은 환자를 한꺼번에 수술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의료진은 응급실로 실려 온 환자들을 분류했다. 생존 가능성이 더 큰 환자를 우선순위로 가려내어 넘버링했다. 넘버링을 마친 환자들은 카트에 실어 수술방 앞에 줄을 세워 놓았다.(중략) 의사들은 맡은 수술이 끝나는 대로 대기 중인 다음 환자를 수술방으로 들였다.
(중략) 리어카에 실려 들어온 (고등학생) 환자는 복부에 총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 모습은 말 그대로 참혹했다. 환자는 상복부, 하복부가 다 날아가고 없었다. 총알이 복벽을 다 없애 버린 것이었다. 내장이 몸 바깥으로 나와 꿈틀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이 환자를 맡아 수술을 했다.(중략) 터진 창자를 다 봉합하고 보니 배를 닫을 수가 없었다. 복벽이 없는데 무슨 수로 배를 닫는 단 말인가! 정말 기가 막혔다. 고민하다 수술대를 90도로 꺽었다. 환자의 몸을 ㄱ상태로 숙여 놓고 남아 있는 복벽을 와이어로 최대한 끌어 당겼다. 고생한 끝에 겨우 배를 닫을 수 있었다. 다행히 살 운명이었는지, 환자는 회복이 잘 되었다. 상처도 감염 없이 잘 아물었다. 이 환자와는 5·18 이후에도 레지던트 생활을 하면서 가끔씩 만났다.(후략)
전남대병원이 시내 쪽에 위치해 있다 보니, 수시로 총소리가 들렸다. 무서워서 병원 바깥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시외 전화도 끊겨서 다른 지역의 사람들과 연락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의료진은 외부와 단절된 채 시내에서 벌어지고 일들을 소문으로만 전해 들었다.
하루는 공수부대원들이 응급실에 최루탄을 터뜨렸다. 병원으로 숨어든 시민군을 잡겠다고 벌인 일이었다.(중략) 공수부대도 대한민국의 국민이고, 광주시민도 대한민국의 국민인데, 무엇 때문에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어야 하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5·18 초기까지만 해도 나는 전두환이 누군지 잘 알지 못했다. 시민군이 결성되고, 광주가 아수라장이 되고 나서야 전두환이 누군지 알게 되었다.(중략)
◇ 독침에 맞았다는 남자
5월 25일 즈음, 장아무개라는 이름의 환자가 응급실로 실려 왔다. 환자는 등에 독침을 맞았다고 말했다. 환부를 살펴보니 무엇인가에 찔린 작은 상처가 있었다. 나는 환자의 혈압과 의식을 살폈다. 하지만 독극물에 의한 증상은 보이지 않았다.
당시에는 독극물 검사를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지 않았다. 조직 검사라도 해 두어서 자료를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환부의 일부 조직을 떼어 조직 검사를 맡기고 환자를 입원시켰다. 환자에게는 항생제 조금과 수액을 처방해 주었다. 그 후 정신없이 수술을 하다가 오후 늦게 병실로 올라가 보았다. 환자는 퇴원을 하고 없는 상태였다. 조직 검사는 피하, 피부 조직 쪽에 미세한 염증 반응이 있다는 리포트가 나왔다.
독극물 검사를 한 것이 아니어서 독극물인지 아닌지는 정확히 판단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했을 때 독침은 아닌 것 같았다.(중략) 보안대에서 연락이 왔다. 독침 사건과 관련하여 진술을 해달라고 했다. 그 시기, 보안대의 분위기는 살벌했다. 보안대 직원들은 평상시에도 총을 차고 다녔다.(중략)
나는 송정리쪽에 있던 보안대로 가서 장아무개 환자에게 어떤 처치를 했는지, 어떤 것을 느꼈는지 등을 있는 그대로 말해 주었다.(중략) 그리고 장아무개 환자의 사건이 크게 이슈화 되었다. KBS에서도 인터뷰를 요청해 입원 기록지, 차트 등을 스캔해 갔다. 심각한 사건이 아니었는데 왜 이렇게까지 이슈화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후략)
*이 글은 전남대병원의 협조로 <5·18 10일간의 야전병원>에 수록된 정종길 1980년 당시 전남대병원 외과 레지던트의 증언 <그 모습은 말 그대로 참혹했다>에서 발췌했습니다. 쿠키뉴스-전남대병원의 기획연재 <5·18 시민 곁엔 그들이 있었다>는 다음 스토리펀딩에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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