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생전 그렇게 참혹한 광경은 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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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시민 곁의 그들⑥] 류재광 5·18 당시 전남대병원 인턴 인터뷰

기사승인 2017-08-29 00:03:00


[쿠키뉴스=김양균 기자] 5·18 광주민주화항쟁의 재수사 요구가 뜨겁다. 이러한 요구는 5·18의  진상 규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지점부터 시작된다. 최근 속속 밝혀지고 있는 새로운 증거들은 재수사 요구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 1980년 광주 전일빌딩에의 헬기 사격과 관련, 탄피와 증언 등이 나오고 있으며, 당시 전투기가 무장한 상태에서 출격 대기를 했다는 증언도 더해졌다. 여기에 1980년 5월 21일 계엄군의 발포와 관련, 사전에 신군부의 ‘발포 명령 하달’이 명기된 문서가 공개되는 일도 있었다. 

이러한 내용들은 1997년 대법원에서 다뤄지지 않았었다. 이와 관련해 정부는 국방부에 특별조사단을 꾸렸고, 국회는 진상조사위 발족에 대한 특별법이 발의돼 있는 상태다. 처벌도 미진하다. 1997년 전두환 전 대통령은 내란죄와 내란목적살인죄 등 10개 죄목으로 무기징역을 받았지만, 2년 뒤 특별사면됐다.   

5·18 당시 전남대병원 응급실장(인턴)으로 환자를 돌본 류재광씨의 증언을 확보했다. 24일 목포한국병원에서 만난 그는 참혹했던 당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자위권 발동을 빌미로 계엄군이 시민군을 향해 집단 발포를 한 것이나 광주를 포위하고 언론을 통제한 건 누구인가? 광주민주화항쟁을 북한 조종에 의한 폭동으로 매도한 건 누구이겠나?”

◇ “왜 병원에 왔소?”

- 5월 17일 상황은 어땠나.

(1980년) 5월 17일 자정 무렵이었다. 나는 당직 근무를 하다가 응급실내 의사대기실에 누워 한숨을 돌리고 있었다. 간호사가 황급히 뛰어오더니 군인들이 몰려왔다고 했다. 나가보니 정말 응급실 옆의 엘리베이터 앞에 공수부대 1개 지대 병력 40여명이 모여 있었다. 10명씩 4줄로 선 그들은 착검상태였다. 권총을 찬 대위와 상사도 함께였는데, 주된 지시는 상사가 내리고 있었다. 그 시각에 병원에서 의사는 당직을 서던 나 혼자뿐이었다.  

- 공수부대가 병원에 온 이유에 대해 말하던가. 

“왜 병원에 총칼을 들고 왔느냐”고 물었지만, 그들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곧 10명씩 줄지어 병원 계단을 올라 병원 곳곳으로 이들은 흩어졌다. 어찌할 방도가 없어 다시 응급실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새벽6~7시경 간호사로부터 학생 환자들이 밀려온다는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에 공수부대가 투입돼 학생들을 곤봉으로 두드려 팬다는 것이었다. 군인들이 주로 머리를 내리쳐서 뇌출혈 환자가 속출했다. 18일 신경외과는 이처럼 머리를 다친 환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18일과 19일 공수부대는 시내에서 학생처럼 보이면 무조건 구타했다.  

- 정호용 당시 소장을 목격했다고 들었다. 

20일은 다소 소강상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날 나는 인턴 몇 명과 전남도청에 가기로 했다. 한참을 걷다가 정호용 특전사 소장을 목격했다. “저 사람, 정호용이다!” 동료의사 중 한 명은 79년에 정호용 당시 사단장의 예하부대에서 군의관으로 근무를 한 적이 있었다. 동료는 정 소장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 20일 상황은 어땠나.

당시 조선대병원은 공수부대가 막고 있어서 시민들이 가질 못했다. 그 때문에 적십자병원과 전남대병원, 기독병원으로 환자들이 몰려들었다. 20일 상황이 일시적으로 소강상태에 들자, 시민들은 공수부대에게 항의하곤 했다. 그러나 이들은 “다른 부대라 우린 모른다”고 발뺌했다. 아무런 보도도 하지 않는 광주MBC는 시민군에 의해 불탔고, 광주역도 난리가 났다. 그날 저녁 병원 옥상에서 내려다보니 시민들은 횃불을 들고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른 정부를 향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 공수부대는 21일 시민에게 발포했다. 

21일 오후 1시 계엄군이 시민을 향해 발포를 한 직후, 병원으로 환자들이 밀려들어왔다. M16 기관총에 맞아 사망한 시신들도 병원으로 실려 왔다. 사람의 형상이 아니었다. M16은 총알의 회전이 강하기 때문에, 총에 맞으면 총알이 회전하면서 주변 조직을 전부 휘감아 버린다. 다리에 총을 맞은 환자는 다리가 끊어졌고, 이마에 총을 맞은 시신의 경우, 머리가 전부 날아가고 턱만 남아있었다. 당시 나는 스물여섯 살이었다. 이런 참혹한 광경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그러나 공포에 사로잡힐 여력조차 없었다.  

- 응급실 상황은 어땠나.

병상이 모자랐다. 이송된 환자는 병원 바닥에 눕히곤 했다. 비교적 상처가 가벼운 환자들은 병원 1층 본관과 원무과, 그리고 대기실과 복도에 매트리스를 깔아놓고 눕혔다. 총상환자는 출혈이 심하니까 혈관 노출술을 통해 수혈을 해야 했다. 한참 시술을 하다 돌아보면 환자의 숨이 끊어져 있었다. 그러면 바로 다음 환자로 넘어갔다. 아비규환이었다. 


- 계엄군이 철수하면서도 사망자가 많았다고 들었다. 

21일 시민군은 방어를 위해 화순과 담양으로부터 무기를 들고 왔다. 이미 경찰은 다 도망가고 없었다. 4시께 시민군이 광주 시내로 들어오고, 6시께 일몰이 어스름할 무렵, 대포 소리가 들렸다. 공수부대가 철수를 하면서 마구 총을 쏘아댄 것이었다. 계엄군은 철수를 하면서 2층 이상의 건물이 나오면 선탑자가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면 트럭 뒤에 탄 군인들도 일제히 건물을 향해 사격을 했다. 이때 무고한 시민들이 많이 죽었다. 공수부대는 제대로 보지도 않고 총을 갈겼다.  

- 다수의 시신을 보면서 패닉 상태에 빠지진 않았는가.

총을 맞고 실려 온 환자들을 보면서 당시 난 정신없이 살려야겠다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은 할 틈이 없었다. 훗날 희생된 시민들의 시신을 검시하면서 불과 20일 남짓한 기간 동안 무수히 많은 시신과 피를 목격했다.  

의료진 중에도 봉변을 당한 사람이 있었다. 당시 외과 레지던트였던 박 아무개는 출근길에 공수부대에게 잡혀서 조선대로 끌려갔다. 구타를 당하던 중에 그의 친구가 마침 공수부대의 군의관이어서 구사일생으로 풀려났다. 전남대병원의 정문을 지키던 수위는 젊은 사람이었는데, 공수부대에게 폭행당해 훗날 심각한 정신적 문제를 겪었다. 계엄군은 젊은이들만 보면 무차별 폭행을 가했다. 간호사들은 상당히 힘들어했다. 

- 외신기자들이 병원에 취재차 찾아왔다고 들었다. 

22일 외신기자들이 병원을 찾아왔다. 미국 <워싱턴포스트> 기자에게 나는 부상자들을 보여주고 당시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독일 <쥐트도이체 차이퉁> 동경 특파원은 부산까지 배를 타고 와서 여수로 이동, 다시 광주까지 자전거를 타고 들어왔다고 했다. 그의 취재에 협조해 많은 사진을 찍게 해줬다. 그들은 많은 사진을 찍어갔는데, 훗날 보니 보도가 그리 많이 되진 않아 의아하게 생각했다. 

영화 <택시운전사>를 보다 문득 든 생각이 광주를 포위하던 공수부대가 사진 필름 등을 탈취하는 등 방해한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당시 군인들은 광주를 틀어막고는 외부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했다. 반면, 국내 기자들은 병원에 오지 않았다.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되고 난 후, 서울에 있던 아내에게 물어보니 서울에선 광주민주화항쟁에 대한 소식이 전혀 전해지지 않았다고 했다.  

- 22일 이후 병원 상황은 어땠나. 

22일부터 병원으로 오는 시신은 확연히 줄어들었다. 그로부터 나흘 뒤 ‘독침사건’이 있었다. 그날 오전 10시경 젊은 남자 한 명이 ‘나 독침 맞았소’라고 악을 썼다. 그러나 발진은 없었다.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전남도청에서 화장실에 가는데 누군가 무언가를 훅 불어서 등이 따끔했고, 독침인 줄 알고 왔다고 말했다. 

이상한 건 남자가 병원에 오자마자 곧 어머니란 사람이 울면서 병원에 따라 들어왔다는 점이다. 그런데 얼굴을 보니 낯이 익었다. 일전에 간 적이 있는 막걸리집 주인이 아닌가. 그는 자신의 남편이 광주경찰서의 정보과 형사라고 했었다. 독침에 맞았다는 아들은 전남도청 시민군의 정보부장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그러나 곧바로 사라져버렸다. 이후 시민군에 북한군이 섞여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 5·18을 비롯해 세월호 등 다수의 재난 상황을 겪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의사로써 광주항쟁, 아시아나 항공기 추락사고, 세월호 등을 겪었다. 재난에 대한 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판단이 들었다. 재난의 기본은 구급헬기라고 본다. 과거 일본 고베 대지진 당시 모든 도로가 마비되자, 닥터헬기를 도입하게 됐다고 하더라. 닥터헬기는 현재 일본 내 50여대가 운용 중이다. 한국의 경우, 해경과 119가 각각 헬기를 보유하고 있지만, 통합이 안 돼 업무 중첩이 발생할 때가 적지 않다. 재난 상황시 헬기의 통제 및 운용이 절실하다는 생각이다.  

*쿠키뉴스-전남대병원의 기획연재 <5·18 시민 곁엔 그들이 있었다>는 다음 스토리펀딩에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angel@kukinews.com

김양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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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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