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김양균 기자] 의료인 증언집 ‘5·18 10일간의 야전병원’에는 당시 상황에 대한 중복되는 증언이 많다. 이러한 부분은 사실의 기록이라는 관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비록 증언자들의 이야기가 병원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5·18 참상의 단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상징적이다.
이번 연재에서는 5·18 당시 손민자 전남대병원 간호감독의 증언을 소개한다. 손민자씨는 증언집에서 “총 든 시민을 ‘아군’이나 ‘우리 시민들’이라고 주로 불렀다. 군인들은 ‘공수부대’나 ‘계엄군’이라는 호칭을 썼다”고 말해, 시민군을 향한 당시 병원 의료진의 시각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 시민들은 ‘아군’
당시 군인들이 병실을 수색했다는 보고를 받기도 했는데 주로 1동이 대상이었다. 수시로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시위가 격화돼 근처에서 도피자가 생겼다거나 병원으로 뛰어들었거나 했을 경우 발생하곤 했다.(중략)
5·18 민주화운동이 발생된 지 얼마 후 집에 갔을 때였다. 아들이 정확하지 못한 발음으로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아들은 약간 흥분된 목소리로 “엄마, 엄마, 비행기에서 총 쏘았어. 헬리콥터에서 총 쏘았어. 총 쏘았어”라고 말했다.
(중략) 식사의 경우 수술실이나 각 병동 부서 등에서 자급자족으로 밥을 해 먹었던 것 같다. 간호부에서는 밥을 해먹지는 않았는데 그렇다고 식당에서 차분히 먹은 기억도 없다. 누군가 응급실 코너에 밥을 갖다 놓으면 틈나는 대로 각자 알아서 먹는 식이었다.(중략)
의약품에서 가장 큰 문제는 혈액과 산소, 마약 관련 약품이었다. 수술을 하기 위해 필수적인 마약, 일종의 모르핀이나 데메롤이 부족한 것이었다. 그 때 도움을 준 사람들이 시민군이었다. 응급실에 대기하고 있는 시민군에게 상황을 설명하면 한 밤중이라도 산소 탱크를 가져 왔는데 출처를 물어보면 송정리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나주라고 하기도 했다.
수술실 간호감독 말에 따르면 당시 수술실에서 쓰던 산소 탱크가 50개 가량 있었는데 외부에서 가져온 탱크 수가 훨씬 많았다고 한다. 시민군들은 모르핀이나 데메롤 역시 부족할 경우 약국 문을 두드리거나 개인 병원 등을 찾아서 구해 왔다. 혈액 부족에 따른 문제는 곧 해결 됐다. 병원 직원은 물론 시민군과 일반 시민들이 자진해서 팔을 걷어붙였기 때문이다.
헌혈과 수혈은 병원에 관련 시설이 모두 갖춰져 있었기 때문에 어려움 없이 진행할 수 있었다. 채혈을 한 뒤 검사를 실시하고 안전성이 보장된 혈액을 수혈했다. RH-형처럼 특수한 혈액형의 경우 시민군에게 말을 하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서 헌혈자들을 찾아서 오기도 했다.(중략)
당시 우리는 총 든 시민을 ‘아군’이나 ‘우리 시민들’이라고 주로 불렀다. 군인들은 ‘공수부대’나 ‘계엄군’이라는 호칭을 썼다. 그러나 응급실에 대기하는 시민군의 경우 얼굴도 알고 친해진 상황이라 이름을 부를 필요도 없이 바로 대화를 하고는 했다.
시민군은 응급실과 병동 등에 고정적으로 있었다. 교대로 근무를 하는 것 같았는데 나는 지금도 당시 산소와 마약 등의 의약품을 가져다 준 사람을 알고 있다. 직접 피해를 본 사람뿐 아니라 그렇게 솔선수범해서 활동했던 사람들도 5·18 유공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시민군 은폐하면 병원 폭파시키겠다”
(전남대병원) 1층 현관홀에서 계단 방향 입구 쪽에서 계엄군 군복을 입은 높은 계급의 사람이 병원 직원 아무개에게 “폭발물을 설치해 놨다. 우리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시민군을 은폐하면 폭파시켜 버리겠다….”고 말을 하고 돌아서는 것이었다.
나는 얼른 그 사람의 얼굴을 보기 위해 뒤쫓아 갔다. 나는 그가 계단 쪽에서 커브를 돌 때 옆모습이나마 분명히 볼 수 있었다. 그 후부터 우리는 공포 속에서 근무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옥상 어디에 폭발물을 설치했을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생각뿐이었다.
그동안은 옥상에 자주 올라가 도청이나 시내에서 시위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그날 이후로는 올라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무서웠다. 병원 건물에 1000~2000명의 사람이 있는데 폭발물이 터질 경우 수많은 사람들이 죽을 수 있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밀려 왔다.
27일 계엄군이 도청을 진압할 때 병원 응급실에 총알이 날아든 일이 있었다. 당시 응급실이 도로와 인접해 있어서 우리는 창문에 커튼을 치고 매트리스를 세워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군인들이 들어오면서 총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나중에 응급실에도 총격이 가해졌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과 달리 당시에는 매트리스 내부가 스펀지가 아닌 솜이었는데 밖으로 관통하지 않고 안으로 둥글게 말려 있는 총알을 우리가 직접 빼내기까지 했다.
응급실 콘크리트 벽에도 총알 흔적이 있었으며 유리창이 깨지기도 했다. 우리는 군인들이 병원 응급실에 환자가 있을 줄 알면서도 총격을 가했다는 점에서 울분을 참지 못했다.
(중략) 5·18 민주화운동 당시에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환자가 오고 수술을 받아야 한다면 혈관 주사를 놓고 어떤 수술을 받아야 할지를 우리가 일차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의사는 물론 인턴이나 레지던트가 있다고 해도 모두 정신없이 바쁜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종이에 이름 홍길동, 나이 몇 살, 어디에 총상, 어디에 골절상… 등을 이마나 가슴에 써서 붙여 놓으면 의사들은 자신들의 과에 해당하는 환자를 데려 가는 방식이었다. 위기상황이 닥치니까 간호사들의 역할이 확대될 수밖에 없었다.
수술도 할 수 없이 사망하게 될 환자는 중환자실로 올려 보냈다. 그곳에서도 기관삽인이나 기관절제술을 해야 한다는 결정을 우리가 하는 사례가 많았다. 이어 의사가 오면 의견을 전달하고 그때부터 처치를 진행했다.(중략)
계엄군이 도청으로 재진입하기 전에도 나는 병원에서 똑같이 근무하고 있었다. 26일부터 군이 다시 진주한다는 소문이 퍼졌다고 하는데 나는 듣지 못했다. 다만 그 즈음에는 시민군과 군의 충돌이 없는 진정 국면이어서 퇴원하는 환자들이 많았다. 무서워서 집으로 가겠다고 하는 환자들을 꽤 많이 퇴원시켰는데 그래도 역시 병원은 만원이었다.
다행히 분만실을 찾은 산모들은 큰 불편 없이 애를 낳을 수 있었다. 분만실이 응급실과 떨어져 있고, 간호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등화관재 훈련이 수시로 있던 때라서 야간에는 훈련 때처럼 커튼을 치면 불빛이 새어 나가지 않기 때문에 총탄 등의 위기상황에서도 좀 더 자유로울 수 있었다. (후략)
*이 글은 전남대병원의 협조로 <5·18 10일간의 야전병원>에 수록된 손민자 1980년 당시 전남대병원 간호감독의 증언 <우리는 환자를 가리지 않는다>에서 발췌했습니다. 쿠키뉴스-전남대병원의 기획연재 <5·18 시민 곁엔 그들이 있었다>는 다음 스토리펀딩에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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