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 돌아 다시 세월호. 쿠키뉴스는 지난 2014년 4월 19일, 세월호 참사 3일째 하루의 기록을 전한다. ‘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도할 수 있는가’라는 현장의 요청은 3년이 지난 현재도 유효하다. 지지부진했던 세월호 인양부터, 추가 실종자 수습까지 숨가쁘게 진행된 세월호의 파노라마는 한국 사회의 숨은 민낯을 여과없이 드러낸다. 쿠키뉴스 추석 특별보도 ‘다시 보는 세월호의 참상, 세월호 어게인’은 총 세편으로 구성된다. 본 기사는 마지막편, ‘청와대로 갑시다’이다. 편집자 주.
*경찰이 세월호 실종자 가족들이 임시거처로 머물고 있던 진도실내체육관을 에워쌌다. 정홍원 전 국무총리의 두 번째 현장 방문은 화를 더 키웠다. 진도에서 걸어서 청와대로 가려는 가족들은 경찰에게 저지당하고 일부는 실신했다. ‘눈물의 진도대교 행진’을 촉발된 이유는 무엇일까? 2014년 4월 19일 오전 11시38분으로 되돌아가 본다.
“이게 TV 나가는 거예요? 왜 편집을 하냐고.”
진도실내체육관 내 전광판 앞에서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전날 새벽 3시40분에 해경특공대와 민간 구조단이 잠수해 촬영했다던 영상을
“애가 타게 왜 그걸 똑바로 못해요?” 영상이 준비되는 동안 가족들 중 누군가가 외쳤다. 드디어 영상이 시작됐다. 모든 사람들이 숨을 죽였다. 흔들리는 화면으로 바닷물과 잠수부의 손이 보인다. 카메라는 잠수부의 헬멧에 부착됐다. 화면으로 가이드라인을 잡고 잠수부의 손과 뿌연 바다 속이 보인다. 스피커에는 잠수부의 산소탱크가 내는 반복적인 공기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두 번째 영상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거 뭐야?” 두 번째 영상이 끝나자, 곁에 앉은 일본기자가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앞에 앉았던 금발의 외신기자는 밖으로 나가버린지 오래. 중국에서 온 카메라 기자는 영상 도중 슬쩍 카메라를 꺼버렸다. 실종자 가족들도 말문이 막혔다. 해경 관계자에게 실종자 가족 중 한 명이 물었다. “몇 미터까지 내려간 것인지….”
해경 관계자가 대답했다. “이 영상을 저도 여기서 처음 봤습니다. 보니까 우리 대원들이 오늘 새벽에 수색작업을 한 영상인데, 저도 아까 게이지를 유심히 봤는데 금방 지나가는 바람에 수심을 제가 확실히 보지 못했습니다. 정확한 수심은 모르겠는데, 제가 어제부터 여기 와 있으면서 저도 따로 보고받지는 않습니다. 저도 현장에서 잠수를 하고, 현장 잠수 반장 격인데요. 통합지휘를 하고.”
“밤인데 해경 관계자분들께서 보신 시계(눈으로 볼 수 있는 거리)가 바로 코앞의 10~20센티미터라고 분명히 말씀을 하셨습니다. (영상을) 보니까 시계가 한참 넓은데, 시계가 얼마나 되는 겁니까?” “한 0.5미터? 그 정도는 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 눈 감고 작업하는 것은 아닌가요?” “시야라는 것은 볼 때마다 항상 다릅니다. 항상 똑같은 게 아니고요.” “시계가 10~20센티미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날이 더 많았습니다. 오늘 새벽이 (시계가) 상당히 좋은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저 정도로 잘 찍혔는데, 저기서 보면 부유물이 있지 않습니까? 굉장히 많이. 그런 것들 때문에 물이 흐리고 앞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여기는 수심이 거꾸로 봤을 때, 한 20미터 정도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잠수부가) 줄을 타고 내려갑니다. 신속하고 빨리 내려갑니다. 왜냐하면 공기가 떨어지기 전에 잠수를 오래하기위해 내려갈 때 신속하게 빨리 내려가고. 그 다음에 내려가서는 (가이드라인이) 안 보이죠? (세월호의) 파이프와 하얀 철판이 보입니다. 그것은 복도 난간입니다. 선체의 3층과 4층에 보면 뚫린 복도가 바깥쪽으로 있습니다. 그 부분을 왼손으로 잡고 오른손으로 랜턴으로 안쪽을 비추면서 쭉 갔습니다. 복도 중간에 뚫려있는 문을 지나고 다니면서 노란 컨테이너가 박혀있는게 보였고요. 끝까지 간 다음에 다시 돌아와서 올라온 것 까지였습니다. 다른 특별한 소득은 없었습니다.”
여기저기에서 한숨이 터져나왔다. “우리가 확인하고 싶은 것은 (세월호) 선내의 상황을 보고 싶거든요. 왜 그것은 촬영을 못해왔습니까?” “선내에 진입을 못한 겁니다. 복도에서 거기까지 다니면서 충분히 들어가질 못했습니다.” “가이드라인이 선내까지 연결이 되어 있을 것 아닙니까?” “선내까지 아직 연결이 안 되어 있습니다.” “여태까지 선내에 어떻게 들어갔습니까?” “선내에 못 들어갔습니다.”
“여태까지 잠수부들이 선내에 한 번도 못 들어갔다는 겁니까?”
“예.”
‘세월호 침몰 사흘이 되도록 선내에 한 번도 못 들어갔다.’ 이 말에 실종자 가족들은 크게 동요했다. 한숨과 울음소리가 커졌다. 뒤에 있던 실종자 어머니는 “도대체 뭐하는 거냐”고 탄식했다. 격앙된 질타가 이어졌다.
“이건 뭣 하러 보여줘요? 힘들게 일했다는 그거 한 가지뿐이잖아요?” “탐색했다는 것(영상)을 갖고 왔더라고요. 갖고 와서 (실종자 가족들에게) 틀어주고 저보고 올라가서 설명하라고 해서 나와서 설명 드리고 있습니다.” “포기하라 그거잖아요? 포기하라고….” 말을 채 잇지 못하고 한 여인이 울먹였다.
“그건 아니고, 새벽에도 이렇게 들어가서 탐색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시고요. 물살 흐름이 정조 때인데도 물밑에서 올라올 때 보면 아시겠지만, 부유물들이 오른쪽·왼쪽으로 움직입니다. 파도가 쓸리는 장면입니다. 그런데서 이렇게 성과가 없어서 죄송합니다.”
“산소 주입하는 호스가 안 보이네요. 아직 그것도 설치 안 된 거예요?” “산소주입은 다른 업체에서 했고, 저희들은 사람을 찾기 위해서 빨리 움직이며 수중 탐색을 한 겁니다.”
선내로 가이드라인이 왜 연결되지 못했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해경 관계자는 ‘짧은 시간 안에 출입구를 찾아 들어가느라 못했다’고 대답했다.
“유속도 빨라 보이지만 들어갈 때는 빨리 들어가잖아요?” “내려갈 때는 빨리 내려갑니다.” “랜턴 들고 촬영까지 할 수 있을 정도면 거기서부터도 더 진행을 할 수 있는 상황인데, 지금 안 되고 있는 거잖아요?” “지금 시간이 한 이십분이 넘는 것 같습니다. 20미터가 넘는 수심에서 25분 정도 오리발을 계속 차면서 다니면 공기가 거의 고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만큼 갔다가 돌아오는 공기도 있어야 하기 때문에 더 이상 못가고 올라와야 합니다.”
“내려가는 것 보면 장애물도 없고, 거기까지 가서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인데….” “거기까지 갔기 때문에 지금도 거기서 이어서 더 들어가고 있습니다. 산소 주입할 때는 여러 가지 위험성이 있어서 잠수를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제, 그제도 산소주입이 있어서 산소 주입하는 시간에는 잠수를 못했습니다.” “산소 주입했다는 증거도 없잖아요.”
“계속 저희에게 얘기했을 때, 선내까지 들어간 것. 들어가는 게 아니라, 선내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이 30~40분 된다고 얘기 하지 않으셨습니까?” “말은 그렇게 해놓고 지금 보여주는 게 아무것도 없잖아요?” “잠수부들이 들어가서 선내의 모습을 보여 달라고요. (전에 말한 대로라면) 30~40분씩 있는데 왜 가서 그런 것을 못 찍고 오냐고요?” “지금 우리는 그걸 보기 위해서 이렇게 기다리고 있지 저걸 보려고 기다리고 있는 것 아니잖아요.”
당황한 낯빛이 역력한 해경 관계자가 말을 더듬으며 해명했다. “저희는 20~30분 정도 있을 수 있습니다. 촬영한 것만 보면 쉬워 보이지만, 잠수부들이 헬멧에 카메라를 부착하고 아주 힘차게 발을 세게 차서 멀리까지 갔다 온 겁니다. 그렇게 갔다 와서 호흡이 숨차서 아까도 중간에 콜록콜록 하는데….”
“숨 찬다고 하지 마세요. 그 안에 있는 애들을 생각해보세요. 그 안에 있는.”
“(잠수부) 한 조가 갔다 올 수 있는 시간이 25분 정도입니다. 산소통 용량이 그렇습니다. 저 수심에서.” “그 사람들은 두 사람이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몇 백 명이 있잖아요. 지금.” “지금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대한민국에 오랫동안 숨 쉴 수 있는 산소통이 저 것(25분 용량)밖에 없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그거 아닌데 왜 (큰 용량의 산소통을) 안 갖고 와요?” “용량 큰 걸, 지금 사람이 죽어 가는데. 조그만 거(25분 용량의 산소통) 가지고 살리자고 지금 들어갔다 나오는 시늉만 하는 것 아닙니까?”
◇ “왜 구조를 하지 않나”
진도실내체육관에선 탄식과 울음, 분노의 고함이 요동쳤다. 아비규환이었다. “이게 대한민국이야.” “답은 딱 나와 있어. 시간 때우다 죽으면 데려가라 이거야. 지금.”
해경은 해명 조차 포기한 듯 보였다. 말은 계속 바뀌었다. “저희들이 매일 잠수하기 때문에 잠수병 걸리지 않게 올라올 때는 아까 보셨다시피 천천히 올라옵니다. 천천히 올라가야 되고. 잠수작업시간은 25~30분씩 유지를 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때, 누군가 물었다.
“산소통이 더 큰 것은 없는 겁니까?” “지금 이게(25분 용량의 산소통) 가장 보편적인 것이고, 더 큰 것은 특수한 경우에서만 쓰지 저희 해경에서는 가장 이게 정상적인 기본적인 장비입니다.” “지금 ‘특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작은 (산소)통으로 한다’는 얘기죠?” “가장 스탠다드한, 보통 잠수 탱크입니다. 일반인들도 다 저걸 쓰고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더 큰 탱크가 있어도 사용을 안 하고 지금 이걸로만(25분 용량의 산소통) 사용한다는 것 아닙니까? 실질적으로 그 배안에 들어갔다 나올 수 있는 시간의 여유가 안 된다는 얘기 아닙니까?”
해경 관계자는 뒷걸음질치며 말했다. “그런 큰 (산소)탱크는 다른 민간업체에서 작업할 때 사용합니다. 저희들은 기본적인 수색작업에서는 이걸(25분 용량의 산소통) 사용하고 있습니다.”
한 중년여성이 다 끝났다며 탄식하자 옆에 앉은 딸이 화를 냈다. “엄마, 그럼 (동생을) 포기하자고?” “언제 배에 들어간 간당가? 배를 어떻게 들어올린당가? 그럼 내 새끼를 어떻게 빼낸당가?” 여인의 물음에 대답하는 사람이 없다. 회색 모자를 눌러쓴 딸은 아무 말 없이 눈물만 흘린다. 그리고선 앞에 선 해경 관계자를 노려봤다. 스무 살이나 됐을까, 아직 앳된 얼굴이었다. 목소리는 악에 바치고 이를 악문 얼굴은 부들부들 떨렸다.
“그러면 계속 선내에 못 들어가는 거 아니에요? 맨날 똑같은 데만 왔다 갔다 하는 거 아니에요?” 실종자 가족들의 목소리가 커져만 간다. 고함을 지르고 바닥에 주저앉아 몸부림을 친다. “여기에 진실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진실이라고는. 이건 세계적으로 알려야 해. 세계적으로.”
“선수가 침몰할 때까지 당신들 뭐했어? 배가 가라앉지 못하게 그것도 막지 못하고, 크레인 두 대 있던데. 침몰은 못하게 하고 구조는 해야 될 것 아냐.” “다 거짓말이야. 다 거짓말.”
분노와 탄식의 아비규환은 체육관에 요동쳤다. 실종자 가족들은 좀 전의 해경 관계자와 더 얘기를 나누기를 원했지만, 그는 이미 도망친지 오래다. 책임있는 약속을 할 수 있는 책임자는 이곳 어디에도 없었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몰려들었다. 지지부진한 구조에 대한 분노가 오갔다. 취재진 대부분은 한편에 떨어져서 이 광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조금 전까지 자판을 두드리거나 수첩을 든 기자들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기만 했다.
“(가이드라인이) 흔들리고 그냥 내려가 있잖아요? 어디 고정한 것도 아니고, 그걸 하는데 어떻게 삼일이나 걸렸냐고요?” “삼일이 아니라, 시도를 안 한 거지.” “‘작업이 이렇게 힘들다. 구조를 할 수가 없다’ 이런 걸 보여주는 것 밖에 더 돼?” “(잠수부들이 선내에 한 번도 못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너무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수가 있는거야.” “그동안 (해경은) 뭘 한 거예요?” “애기들을 구조하고 더 가라앉지 못하게 해야 할 거 아니에요?”
흰색 점퍼 차림의 한 실종자 어머니가 울먹이며 말했다. “제가 궁금한 건 지금 시체 많이 보신 거죠? 저 문자 받았어요. 구조대원한테. 시신 엄청 많다고, 발견했다고. 제가 마음 아픈 것은 뭐냐면 아무도 (실종자들을) 끄집어 내지 않는다는 거예요. (영상에서 간 곳도) 애들 있는 곳에 간 게 아니잖아요. 지금 (영상이) 화물칸이라면서요. 화물칸에 애들은 없잖아요. 애들이 있는 곳은 3·4층 식당이나 그런 곳에 있다고 저는 알고 있는데. 지금 시간이. 첫날·둘째 날·셋째날…. 시간이 너무 아까워요. 얼마나 애들이 배 속에서 힘들게 구해달라고 했겠어요. 시신이 많다고 들었어요. 연락 왔어요. 어머니 놀랄까봐 지금 (문자메시지로) 보여준다고. 엄마들은 진짜 하루가 천 년 같잖아요. 아니, 꺼내질 않는데요. 시체를 봐도. 그게 이상하다는 거야, 지금.”
“거기(팽목항)가면 다 방송국 차량밖에 없어요. 이놈들 다 빼고, 거기다 천막치고 우리가 있자고요. 방송사 거기서 뭐하냐고. 우리 일가족은 못 들어가는데. 이 새끼들(방송사) 빼고 우리가 거기 들어가서, 시체 나오는 구멍이 거기 있으면, 우리가 거기서 확인하고……. 여기서(진도실내체육관) 우리가 뭐하냐고. 갑시다. 그리로.” “가야죠. 아무리 여기 있어도 소용없어요.”
가족들의 동요가 심상치 않자, 급기야 해경 책임자가 나섰다. 그를 향해 실종자 가족들은 질타를 했다. 단상을 향해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현장의 취재진은 슬금슬금 뒤로 빠졌다. 해경 관계자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동원해서 앞으로도 구조에 전념하겠습니다.” 이 말을 믿거나 안심하는 이들은 없었다.
“구조를 해야지 될 것 아니오? 지금?” “외국에서 지원을 한다고 했는데, 당신들이 거절했잖아.” “도저히 안 되면 (외국에 구조를) 맡기라고.” “(외국이 구조할 수 있도록) 승인만 하라고. 승인만.” “차선책을 빨리 내놓으세요.” “사람들 지치게 기다리는 것 아닙니까?”
실종자 아버지 중 한 명이 소리쳤다. “잠깐만요. 다 들어야합니다. 애들 살리고 싶으면 다 들으세요.” 소란이 조금 잦아든다. 그가 계속해서 말했다. “산소통 시간 더 긴 거 구할 용의가 있다고 했죠? 용량 더 큰 것. 그것 (여태까지) 못 구한 이유가 뭡니까? 위에서 (승인을) 안 해준 거죠? 맞죠?” “저희가 갖고 있는 장비를 최대한 활용해서 쓰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왜 외국에서 지원 안 받는 거예요? 자존심도 다 필요 없어. 도움 받을 땐 받아야 하는 거에요.” “저희들이 (용량 큰 산소통이) 없다는 소리는 한 번도 안했고요. 워낙 파고가 세서 작업하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계속 말씀을 드려왔습니다.” “그럼 (외국에) 구조 요청을 하세요. 하면 되잖아요. 도와달라고.”
“해군 참모총장님도 지금 나와서 지원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삼천포항의 배안에 계십니다. 거기서 해경 구조 작업을 지휘하고 계십니다. 지금도 계속 말씀드리지만 물이 워낙 세서 들어갔다가 객실로 잘 못 들어갈 뿐이지….” “첫 날 양호할 때는 왜 안 구했냐고요?” “외국에도 저희가 다 요청을 해놨습니다.” “해경 물러가고 해군참모총장 데려오라고. 당신들 무능력하니까 군대 동원하라고. 해군참모총장 데려오라고. 경찰 조용하라고. 군인을 데려오라고. 경찰을 못 믿어. 우린.”
“암묵적 살인자.”
“취재진들 다 쫓아낼 줄 알아. (뉴스로) 내보내지도 안을 거면서, 뭘 찍어. 뭘 적고.”
급기야 아버지 한 명이 단상에 뛰어오른다. 해경 관계자들은 전부 도망쳤다. 울음은 통곡으로 바뀌고, 좌절은 분노로 변한다. 청와대로 다 가자는 외침에 가족들이 일제히 소리 질렀다.
“갑시다.”
이후 실종자 가족들과 생존자들은 조직적인 조롱과 괴롭힘을 당해야 했다. 그리고 3년이 지난 2017년 세월호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자 마자 맹골수도에서 끌어올려졌다.
김양균 기자 ange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