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재단 소속 을지대학교 을지병원의 파업이 38일째를 맞고 있다. 계절은 가을을 지나 겨울로 접어들었지만, 사태 해결의 기미는 요원해 보인다. 보건의료노조 을지대병원지부는 “병원의 타협 의지가 보이질 않는다”고 말하고, 병원은 “최선의 제안을 했다”며 선택지는 노조에게 달렸다고 주장한다. 그런가 하면 을지대학교 을지병원 교수협의회는 조속한 사태 해결을 요구하면서도 은근히 노조의 양보를 요구하는 호소문을 내걸기도 했다. 이들 모두가 원하는 건 파업을 끝내는 것이지만, ‘종결’에 이르기까진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지금도 최악인데 더 무너질 게 있겠는가.” 15일 서울 을지병원에서 만난 한 조합원의 일갈이다. 을지병원 파업이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노조는 이날 오전 11시로 예정된 기자회견 준비에 분주한 모습이었다. 지역 시민사회단체 및 타 노조, 정당 등도 연대의 뜻을 밝히고 있는 상황. ‘을지병원 파업승리를 위한 노원지역대책위’는 이러한 지지의 결과물이다.
대책위의 강미경 집행위원장은 “파업 처음부터 연대해왔다. 을지병원의 운영 행태는 환자의 안전에 적잖은 우려를 가져온다. 이 파업은 노동권과 건강권을 사수하기 위한 정당한 권리 행사이다”라고 말했다.
을지병원에선 그동안 적잖은 변화가 있었다. 무엇보다 박준영 을지재단 회장 겸 의료법인 을지병원 이사장은 지난달 30일 사임했으며, 이승진 병원장이나 을지대학교 을지병원 교수협의회도 호소문을 발표했다. 당초 박 이사장의 사임으로 파업 사태가 새 국면을 맞을 것이란 예상도 나왔지만, 박 이사장이 떠나며 남긴 호소문은 파업에 동참한 조합원들의 가슴에 생채기만 냈다.
박 전 이사장은 ‘호소문’에 “노조는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개인의 신상을 들춰내며 협박을 주저하지 않았다”며 “(을지병원을) 최악의 병원으로 매도하고 있다”고 썼다. “설립자님과 저의 삶을 송두리째 부정한다"거나 “노조는 터무니없는 주장이나 현실과 동떨어진 요구, 협박으로까지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고도 적었다. 사실상 현 을지병원 파업사태의 책임이 노조에 있다고 비판한 것이다. 해당 ‘호소문’은 병원 입구와 로비 곳곳에 붙어있다.
노조는 황당하다는 입장이다. ㅅ노조원은 기자에게 “해결의 열쇠를 쥔 사람이 이사장 아닌가. 병원 외래만 운영되면 문제없다는 것인지 납득하기 어렵다”며 “‘을지스럽다’거나 ‘을지옥’이란 말이 공공연하게 오갔다. 열악한 을지병원의 상황을 빗댄 표현마저 나도는 상황에서 박 전 이사장은 무책임하다”고 꼬집었다.
호소문에 분통이 터진 건 비단 조합원뿐만이 아니다. 윤소하 의원(정의당)은 기자에게 박 전 이사장의 호소문에 대해 “어불성설”이며 “적반하장도 유분수”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윤 의원은 “본인(박 전 이사장) 때문에 을지병원이 이 지경이 됐다. 새 병원(의정부 을지병원)을 건립한다면서 노조 탓을 하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렇듯 박 전 이사장에 대한 여러 뒷말이 오가는 가운데, 한 병원 측 인사는 사임의 의미에 대해 “서울-대전 을지병원에 사태 해결을 맡긴 것”이며 “세간의 소문처럼 재단이 뒤에서 조종한다는 건 있을 수 없다”고 말해 확대해석 자제를 요구했다. 이 말대로라면 파업 사태 해결의 ‘열쇠’는 서울 및 대전 을지병원의 이승진, 홍인표 병원장에게 달렸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들이 재단 산하 조직의 이사 등을 맡으며 직간접적으로 재단과 연을 맺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의 선택이야말로 재단의 바람과 일맥상통하는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이 인사는 기자에게 “재단이 병원에 관여하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번 파업 사태는 재단 소관이 아니”라는 다소 모호한 말을 전했다. 서울-대전 병원장 사이에도 난감한 기류가 관측된다. 이와 관련해 해당 인사는 “두 병원장(이승진, 홍인표)도 서로 눈치를 볼 것”이라고 말했다.
‘을지대학교 을지병원 교수협의회’의 ‘호소문’도 눈에 띈다. 이들의 호소문은 조속한 협상 타결을 촉구하면서도 “환자를 담보로 하는 투쟁을 지속한다면 공감을 얻기 어렵다”, “인내심도 한계에 이르고 있다”, “누적된 불만이 많겠지만 한 순간에 모든 것을 보상받으려 하지 말고…” 등의 구절에선 노조에 대한 묘한 뉘앙스가 묻어난다. 이날 만난 ㄱ조합원은 말했다. “이곳에 임금 때문에 나와 있는 사람은 없다. 후배들에게까지 우리가 겪은 불합리함을 답습하게 할 수 없어서 나온 것이다. 파업은 우리야말로 가장 간절히 끝내고 싶다”고 말했다.
‘을지 네트워크’에서 노조는 ‘별종’이다. 병원은 파업으로 경영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고 말한다. 이사장은 파업으로 병원의 이미지가 훼손됐다고 했으며, 교수들은 자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노조라면 거대한 조직 같지만, 이삼십 대 간호사들이 주를 이룬다. 가장 낮은 위치의 직원들이 뭉친 조직이 병원을 망치는 ‘암 덩어리’로 치부되고 있다.
“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면 옆에 있는 사람이 손을 잡아준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걸 서로 알려주는 셈이다.”(ㅂ조합원)
을지병원 파업과 관련해, 윤소하 의원은 “을지병원은 (적폐가) 망라돼 있다. ‘백화점’이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윤 의원은 “이승진 병원장을 만난 자리에서 병원 재경국장이 ‘병원 재정이 어려운데 노조의 요구가 심하다’고 말하더라. 임단협은 밤을 새서라도 진행돼야 한다. 국회에서도 을지병원 사태를 주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양균 기자 ange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