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인은 근로자에도 특수고용노동자에도 해당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또 다시 법의 사각지대에 남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성폭력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연극인들의 호소다. 지난 26일 ‘#Me Too, 이제 국회가 응답할 차례’를 주제로 열린 국회토론회에서 성폭력 반대 연극인 행동(이하 연극인 행동)에서 참석했다고 밝힌 연극인 A씨는 “법과 전문가들의 대책을 기대하고 왔는데 생각보다 실망했다”며 이 같이 말했다.
‘연극인 행동’은 연극계 성폭력 피해자들의 미투(#Me Too) 발언을 지지하고 만연한 성폭력 문제를 대처하고자 연극인들이 결성한 연대다.
A씨는 “오늘 얻은 소득은 ‘모든 (피해)예술가들은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신청을 내라, 지금의 방법이다’라는 점뿐이다. 이제 개인이 SNS에 올리는 것은 그만하고 실질적인 대안이 필요한 때”라고 지적했다.
연극인 행동에 따르면, 연극계 성폭력 문제는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교수·학생 간 관계에서 나타나는 성폭력이며, 다른 하나는 극단 내 성폭력이다.
A씨는 “가부장적 아버지문화가 작동하는 극단 내 성폭력, 성추행, 성희롱이 말도 못 할 정도로 많다”며 “문제는 연극인들은 근로기준법, 특수고용관계법 아무데도 해당되지 않고 또 다시 법의 사각지대에 남는다. 성폭력은 상황의 특수성과 상관없이 경제적, 사회적으로 취약한 이들에게 벌어지는 현상임을 알아 달라”고 토로했다.
특히 현행 성희롱 금지에 관한 규정은 ‘양성평등기본법’,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 ‘국가인권위원회법’에 산재돼 있어 체계적이지 못한 상태다.
또 법안에서 명시하는 법의 주체가 사용자와 근로자, 사업주 등에 한정돼 있어 사각지대를 양산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연극인’ 등 프리랜서 예술가의 경우 현행법상 노동자로 인정되지 않아 이들을 보호할 법적 안전망이 미비하다.
이와 관련 이날 토론회에서는 성희롱 예방과 금지(처벌), 피해자보호에 관한 단일법을 제정해 현행 법제의 한계를 극복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박선영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성희롱 단일 법률에는 성희롱 행위자에 대한 형사처벌, 성희롱 당사자 범위의 확대, 사용자 책임의 확대(징벌적 손해배상), 성희롱 예방교육 실질화 및 다양화 방안, 성희롱 피해자에 대한 보호, 성희롱 방지 의무 등 확대 등이 주요하게 포함돼야 한다”고 제시했다.
박 연구위원은 “성희롱 단일법이 제정된다면 성희롱 정책의 통일성 확보가 가능하게돼 국가에 의한 적극적인 개입을 통한 성희롱 근절과 피해자 보호가 실효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차인순 국회여성가족위원회 입법심의관은 “성폭력 처벌이 실제 적용될 때 답답한 측면이 있다”며 “현재 우리의 현행법상 성추행은 폭행과 협박, 위계와 위력, 심신장애 등 요건을 갖췄을 때만 인정된다는 문제가 있다. 따라서 가장 기본적인 형태의 성추행을 형법이나 처벌법에 만들어둘 필요가 있다”며 의견을 제시했다.
성 불평등이 고착된 문화를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 오찬호 작가는 “피해자가 침묵하고 가해자가 만들어지는 문화가 근본원인”이라며 “법 위에 존재하는 규범과 문화에 주목해야 한다. 공격적인 정책도 필요하지만 문화의 정체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김보화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소 울림 책임연구원은 “미투 운동은 어느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자신의 피해를 알렸던 당사자들, 성폭력 피해자들을 지원하고 피해자의 목소리를 알리려고 했던 수많은 운동들, 사회적 공론화 속에서 만들어졌다”며 “성차별, 성희롱의 문제는 법과 제도의 개선 뿐 아니라 근본적인 인식의 변화와 함께 가야만 실효성있는 변화를 일으킬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토론회에 참여한 정부부처 관계자들은 성희롱 문제 관련 단일법 제정 취지에 공감하고, 함께 협력해나가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조민경 여성가족부 여성정책과장은 “단일법 체계 필요성을 공감한다. 다만 현행 법체계에서도 담당부처 권한이 실질적으로 보장되지 않는 부분은 보완할 필요가 있다”며 “성평등 문화 정착을 위한 전방위적인 캠페인을 전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수연 국가인권위원회 차별조사과 팀장은 “인권위법상 성희롱 시정권고는 하지만 2차 피해 불이익, 즉 가시적인 것이 아니라 소문, 음해, 왕따 등 실체가 보이지 않는 피해는 확보하기 어렵다. 단순 여성비하 등은 성희롱 조사대상에 포괄되지 않아 성차별금지법 제정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냈다.
김현민 고용노동부 여성고용정책과 사무관도 “ 근로기준법이 주로 사업주와 근로자의 관계를 규율하는 법안이다보니 (성폭력)행위자 처벌이 어렵다는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부분은 단일법 체계를 통해 보완할 수 있겠다. 특수고용형태 종사자 또한 단일법이 제정되면 성희롱 당사자 범위로 확대 논의가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미옥 기자 romeok@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