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의학에는 인생이 담겨있습니다. 누구도 이길 수 없는 세월 앞에 겸허할 따름입니다.”
노인의학의 대가(大家) 유형준 전 한림의대 강남성심병원 내분비내과 교수는 세월을 ‘가장 강력한 힘’이라 일컬었다. 노인당뇨병회장, 대한노인병학회장, 한림노인병연구회장 등을 역임하며 노인의학 연구에 힘써온 유 교수는 지난달 28일자로 정년을 맞아 교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퇴임식을 하루 앞둔 날, 유 교수를 만나 세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지금 상태는 망가진 것도 아니요, 무너진 것도 아닌 당신이 살아온 삶의 역사 그 자체입니다.”
노인 환자들에게 유 교수가 늘 건네는 말이다. 노화를 그대로 인정한 후에 의학적으로 접근하겠다는 철학이 담겨 있다. 유 교수에 따르면, 노인의학은 의사가 환자를 대할 때 객관성을 유지하기가 매우 힘든 분야다.
그는 “보통 의사와 환자의 질병관은 대조적이다. 환자는 주관적으로 자신의 질병을 바라보고, 의사는 지극히 객관적으로 질병을 살핀다. 하지만 노인에 대해서는 의사도 객관적이기 힘들다”며 “세월을 어떻게 의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겠느냐. 노인 환자의 상태는 그가 축적해온 세월의 모습이고, 객관적이고자 해도 내 이야기와 맞닿아있기 때문에 주관성이 개입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노인’에 접근하는 방식도 달랐다. 마찬가지로 세월을 부정하지 말자는 것이 핵심이다.
유 교수는 “의학은 인간이 왜 늙는지 모른다. 늙는다는 것은 신의 영역이고, 노화를 피하는 방법은 없다”며 “젊음처럼 보이는 것은 젊음이 아니”라고 했다. ‘노화방지’란 젊음을 흉내내기 일뿐 실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그는 노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자고 이야기한다. 유 교수는 “노인이 절망하는 이유는 젊은 시절의 모습을 바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불가능하다”며 “험하게 사용한 꽃삽은 깨지고 금이 가 있는 것이 자연스럽다. 노인의학은 쓸모있는 모습을 찾는 과정이다. 고칠 수 있는 부분을 고치고, 딱딱한 흙 대신 부드러운 모래를 옮기는 용도로 사용하면 된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는 이미 지난해 65세 노인 인구가 전체의 14%를 넘는 고령사회에 접어들었다. 머지않아 초고령사회 진입도 예측돼 노인의학의 중요성은 나날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유 교수는 갈수록 증가하는 노인인구에 대한 사회적 준비를 서둘러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질병개념으로 바라보면 65세 이상 노인은 평균 6개의 질병을 가지고 있다. 이들이 가진 질병을 치료한다는 개념으로 접근하면 한계에 부딪힌다”며 “질병과 상관없이 신체 기능에 집중해야 한다. 병이 있더라도 활기차게 생활하는 노인이 있는 반면, 병이 없더라도 누워있는 노인이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아울러 “그동안 의료인문학을 바탕으로 굿닥터 만들기, 선한 의사 양성에 노력한 것이 가장 보람있다. 앞으로 10년 내 굿닥터들의 활약을 기대한다”며 “퇴임을 앞두니 주변에 조금 더 따스한 영향을 미치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쉽다. (퇴임식에서) 내게 섭섭한 마음이 있다면 놓아달라고 부탁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퇴임 후 그는 CM병원으로 자리를 옮겨 제2의 삶을 시작할 예정이다.
전미옥 기자 romeok@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