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에 대한 기억은 다시 꺼내고 싶지 않은 것들 뿐이다. 당시 언론마다 경쟁적으로 실종자 가족과의 대면 인터뷰를 진행하려 했다. 가족들이 머물던 진도실내체육관의 풍경이란 참으로 괴이했다. 답답함에 담배를 물고 있는 가족들을 취재진이 동그렇게 둘러싸고 있었다. 이유야 뻔했다. 어떻게 하면 이들을 설득해 카메라 앞으로 세울 것인가.
고백하자면 기자도 그랬다. 수차례 실종자 가족들(후에 유가족이 된)과 인터뷰를 진행했지만, 실제 보도까지 이어진 건 없었다. 기사를 만들고도 '스톱'한 게 몇 번인지 셀 수조차 없다. 대단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세월호 4주기를 맞아 기획 기사를 준비하며, 최초 실종자가족과 가진 인터뷰를 공개할지 말지도 적잖은 고민이 있었다. 시의성의 문제보다 과연 이것이 적절한지는 지금도 확신할 수 없다. 그래도 선보인다. 진도대교까지의 눈물의 행진이 이어진 직후, 실종자 가족에 대한 조직적 폄훼가 일어나기 일보 직전의 상황. 2014년 4월 21일 세월호 참사 닷새째 이뤄진 인터뷰를 다시 정리하자니, 가슴이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_편집자 주
버스가 국도에 들어섰다. 타이어가 노면에 부딪치며 내는 마찰음이 요란했다. 더러 흔들리기도 하지만, 승객 대부분은 개의치 않았다. 옆 좌석 남학생의 손가락이 휴대전화 위를 바삐 오간다. 게임에 빠져있던 녀석이 별안간 오만상을 찌푸렸다.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다. 집으로부터의 전화인 듯 했다. “언제와?” “금방 가요” “그러니까 언제?” “아참, 가고 있다니까요.” 짧은 대화를 서둘러 끝낸 학생은 곧 잠에 빠져들었다. 스마트폰은 손에 꼭 쥔 채로. 대화 말미 학생의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금방 갈게요.”
김용상(가명). 용상이가 수학여행을 갔다. 인천부터 제주도까지 배를 타고 간다고 했다. 4월의 제주도 올레길은 개나리꽃이 한창일 것이다. 날씨만 변덕을 부리지 않는다면 볕도 환히 비췄겠지. 2014년 4월 21일 오후 11시 31분. 29분 후면 용상이가 떠난지 일주일째 되는 날이다. 벌써 돌아와야 했는데 여태 소식이 없다. 아이가 탔던 배가 TV에 나온 지도 일주일이나 됐다. 용상이가 있는 곳에는 꽃이 없었다. 볕도 들지 않는다. 아이가 탄 배는 바다 한가운데 거꾸로 박혀 있었다.
“언론을 못 믿겠어요. 미안해요.”
투박한 목소리였다. 사내의 목소리는 거칠었지만, 가늘게 떨렸다. 도대체 이게 몇 번째인지 모른다는 말투였다. 그렇다고 매몰차진 않았다. 그는 내게 사과할 이유가 없었지만, 거듭 미안하다고 했다.
투박한 남자, 그는 아버지다. 아버지였다. 아들에게 살가운 말 한번 해본 적 없지만, 수학여행 전날 슬며시 용돈을 쥐어줬던, 그런 아버지였다. 평생 가족밖에 모르고 산 남자. 그러나 바다는 그의 아이를 삼키고 말았다. 진도실내체육관에 처음 왔을 때, 사내의 가슴에는 시커먼 구멍이 뻥 뚫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구멍은 점점 커져 다리부터 머리까지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용상이의 삼촌에게 다시 전활 걸었다. 그 역시 인터뷰를 거절했다. 마찬가지로 미안하다고 했다. 용상이의 소식을 듣고 진도에 내려갔다가 기자의 전화를 받은 날에야 마침 돌아왔다는 그의 목소리에는 고단함이 배여 있었다. 기약 없는 기다림에 그의 심신을 지치게 했다. 일주일째 일을 못한 터였다. 생계를 위해 돌아온 날부터 당장 일을 시작해야 했다. 그도 아버지였다. 자식의 급식값을 벌어야 하는 또 다른 아버지. 조카 용상이를 기다리고 싶지만, 일터는 그의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가까스로 용상이의 가까운 친척 A씨와 연락이 닿았다. 애끓는 부성에 비하겠냐마는 아이가 바다 속에 있는 한 가족들 가슴의 ‘구멍’은 크기만 다를 뿐 깊이는 같을 것이다. A는 진도실내체육관을 ‘전쟁터’라고 했다. 실상과 전혀 다른 뉴스가 몰아치는 그곳의 풍경에 몸서리쳐진다고 했다.
“방송에서 엉뚱한 얘기들만 하니까요. 구조에 대한 얘기는 없고 계속 했던 것, 사건 경위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하잖아요. 구조 상황을 생중계해서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상황을 보여줘야 하는데, 같은 장면만 반복해서 보여주고 있었어요. 보다 못해 가족들이 직접 배를 빌려서 나갔는데 그걸 보고 한 기자가 그럽디다. ‘지금 가족들은 80만원을 내고 배를 빌려 사고 해역으로 떠났습니다’라고요.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어요.”
◇ 구조가 아니라 인양이 목적이었나
- 세월호 뉴스가 쏟아지고 있어요.
“하루 종일 방송만하면 뭐하냐고요. 뉴스에 알짜 소식이 없어요. 했던 것만 계속 반복되고, 중간에 뭐 하나씩만 끼워 넣어서는. 그거 잠깐 비추고 또 같은 내용 반복하고. 그러니까 믿질 못하는 거죠. 가족들은 ‘선장이 나쁜 놈이다’는 걸 알고 싶은 게 아니잖아요. 선장이 나쁜 놈이란 걸 누가 모르나, 쳐 죽일 놈이라는 것은 다 아는데. 그런걸. 방송하라는 게 아니라, (구조)현장에 가서 수백 명의 잠수부가 투입이 됐다는데, 그 잠수부들이 어떻게 잠수를 하고 있는지 좀 제대로 보여줘야 하는데, 그런 건 없잖아요? 말로만 수백 명이면 뭐해요.”
- 실제 구조 현장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말이죠?
“수백 명의 잠수부가 투입된다는 데,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르겠어요. 가이드라인을 잡고 내려가는데, 줄이 다섯 개래요. 수백 명이 어떻게 잡고 내려가서 구조 작업을 하고 있는지도 궁금하고. 잠수부들이 지쳐서 더 이상 들어가기 힘들다는 말도 그래요. 그 많은 잠수부가 동시에 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잖아요? 조를 짜서 들어갈 텐데. 그런 걸 속 시원하게 전하는 곳은 하나도 없고.”
-가족들은 생계를 제쳐두고 진도에서 구조 소식을 기다리고 계신데요.
“처음에는 가족 모두 진도에 모였다가 하나, 둘씩 직장 때문에 뿔뿔이 흩어져요. 직장 때문에 어쩔 수가 없어요. 지금은 아빠·엄마만 남아 있는 상황인데... 거기에만 매달려 있으면 자영업자는 망할 수도 있어요. 직장 생활하는 사람도 휴직이 하루, 이틀이지 회사에서 내버려둘까요? 처음에야 인정상 이해한다지만 열흘이 될 지, 한 달이 될지 모르는 거잖아요.”
- 용상군 아버지도 힘든 시간을 보내실 텐데요.
“설비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어요.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았어요. 어려운 형편에 용상이 엄마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렵게 결혼해서 살고 있었어요.”
- 사고를 당한 용상군의 친구들의 집안 형편도 비슷한가요?
“좋지 않아요. 그 지역이 다들….”
- 말하기 어렵겠지만 사고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심정이 어떠셨나요?
“사고가 난 지 삼일이 지나서야 알았어요. 직계가족만 내려가서 정신없다 보니까, 저한테 연락할 수도 없었고요. 막상 가족이 그러니까 더 힘들었어요. TV만 켜도 눈물이 나더라고요. 오죽 갑갑했으면 방송국에 전화해서 방송을 좀 제대로 하라고 항의도 했었는데, 결과는 똑같아요. 항의를 해봤자 아무 의미도 없고.”
- 방송국에 항의하니 뭐라던가요?
“그냥 ‘미안하다, 죄송하다’ 그래요. 함미가 아직 가라앉기 전이었어요. 배가 기울어져 있는 상태였는데, 뉴스에서 ‘크레인이 가고 있다. 크레인이 도착하면 이것(세월호)을 뒤집어서 끌어올려야 한다. 네 군데서 끌어올리면 배는 멀쩡할 것이다’ 이렇게 방송을 하니까. 화가 났어요. 뉴스에서 애들을 구하잔 소린 안하고 배를 뒤집어서 끌어올리면 인양이 된다고 말해요. ‘크레인이 가서 더 이상 가라앉게 안하고 구조를 본격화해야한다’ 이렇게 방송이 나가야 하는 거잖아요. 그쪽에 상식이 없는 사람도, 칠 십 먹은 노인네들한테 물어봐도 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방송국에서 그렇게밖에 말하지 못하냐는 거예요. 그 말대로 (배를) 들어 올리면, 배를 건지러 가는 것뿐이잖아요.”
- 구조보다 인양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비판이 일자, 정부는 반박자료를 내놓긴 했어요.
“대기업에서도 자기네들 홍보하러 가는 건지, 구하러 가는 건지 도통 모르겠어요. 나중에는 뉴스에서 ‘부모의 허락을 받으면, 배를 뒤집겠다’고 말해요. 뉴스가 문제가 되면 본인들 책임이니까.”
- 세월호 뉴스로 다시 돌아가 볼게요. 믿을 수 없다고 하셨는데요.
“말도 바뀌고 맞는 게 하나도 없잖아요. 처음부터 계속 뒤집었잖아요. 믿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아요.”
- 대통령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을 것 같습니다.
“국가원수인데 지시해서 안 되는 일은 없잖아요. 대한민국에 구조할 사람이 그렇게 없나요? 그리고 지금 가족들은 보상이 목적이 아니에요. 마치 ‘다 끝났으니까 돈이라도 받고, 생계 어려우니 밥이라도 사먹고 라면이라도 끓여먹어라’ 이런 건가요? 그런 대책은 저라도 세워요. 그리고 (보상금이) 대통령 돈이에요? 국민들 혈세잖아요. 그 전에 이렇게 피해가 안 나게끔 한 사람이라도 건질 수 있게 대책을 세웠어야 했잖아요. 그게 대통령인거잖아요. 다 끝난 다음에 다 죽은 다음에 돈 얘기 하는 건 저라도 하겠어요.”
- 제때 구조를 했어야 했는데… 왜 그렇게 구조에 소극적이었는지 의문이 일고 있습니다.
“초등학생 수준이에요. 국가에서 머리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하는 행태가 진짜 초등학생 수준밖에 안 되는 것 같아요. 이거 하면 엄마한테 혼날까봐, 저거하면 아빠한테 혼날까봐 전전긍긍하고 누가 뭐라고 해달라고 해야만 하는, 그런 수준으로 밖에 안 보여요.”
- 언론에도 하실 말씀이 많으시죠?
“누가 막아서 있는 사실 그대로를 밝히지 못하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이번 일을 보면 실망이에요. 정말 실망이 커요. 언론도 (정부 관계자들과) 똑같은 것 같아요.”
- 언론이 정부의 입장만 대변하고 있다?
“정부 입장만 전하고 우리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아요. 언론매체에서 정말 (보도)할 생각이 있다면, 장비 좋고 시스템 다 되어있는데, (구조작업의) 실시간 (보도)를 할 수 있잖아요. 휴대전화 동영상으로라도 해서 그때그때 1~2분 간격으로라도 보여줄 수 있는데. 그게 안 되는 이유가 뭘까요?”
- 시급한 것은 역시 실종자 구조일 텐데요.
“아직까지도 우리는 희망을 갖고 있는데, 모르겠어요. 다들 다 죽었다고 생각을 하는 건지. 그래서 보상 얘기만 자꾸 나오는 건지.”
- 국무총리에게 물병을 던지는 등 실종자 가족의 격앙된 모습을 비난하는 목소리도 있었어요.
“지금 가족들의 정신이 온전하다고 봅니까? 지금 실종자 가족은 정신이 반쯤 나가있는 상태에요. 어떻게 보면 환자들이에요. 몸부림을 치는 거잖아요. 그럼 안아주고 보듬어줘야지 가족들을 질타하는 게 제대로 된 국민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인가요? 진짜 깡패 같고 나쁜 사람들 같아요. 자기가 안 당해보고 겪어보지 못했으니까 그냥 격한 행동만 보고서... 가족들은 툭 건드리면 그냥 쓰러질 사람들이에요. 죽을 것 같은 사람들이라고요. 이들이 몸부림을 친 건데, 오죽 답답했으면 청와대로 간다고 행진을 했겠어요?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우면 뭐라도 하려고 한 건데, 어떻게 그걸 비난할 수 있나요.”
◇ 사고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
진동이 잦아든다. 버스의 속도가 줄기 시작한다. 옆 자리 학생이 벨을 눌렀다. 버스는 다음 정류장에 멈출 것이다. 문틈으로 TV소리가 새어나온다. 번호키를 누르면 환한 불빛이 소년을 맞을 것이다. 가방을 내려놓으며 소년의 한마디.
“저 왔어요.”
희생된 아이들과 유가족들이 바란 건 별다른 게 아니었다. 사고가 나기 전의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뿐이었다. 그러나 이 바람은 4년이 지난 오늘까지 바람으로만 끝나고 말았다.
*영상은 그해 5월 기자가 만든 다큐멘터리다. 석달 뒤 일본 오사카에 전 세계 시민사회단체가 모인 행사(젠코)에서 다큐가 상영됐다. 관객들은 충격과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당시 기자는 무대인사에서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사고 이전으로 돌아갔으면 한다”고 말이다. 알고 있었다. 이것이 요원하고도 덧없는 바람이란 것을. 그리고 4년이 지났다. 아직 사고의 진실조차 밝혀지지 않았다. 바람과는 상관없이 세월만 덧없이 흐른 세월, 그리고 세월호는 여전히 수면 아래 잠겨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김양균 기자 ange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