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여성흡연 감소책이 '여성의 성역할 이해'?

[기자수첩] 여성흡연 감소책이 '여성의 성역할 이해'?

기사승인 2018-06-01 04:00:00

“젊은 여성들이 많은 사업장에 ‘여성의 성역할 이해하기’ 감성코칭교실을 운영하고, 여성을 위한 효과적 맞춤형 다이어트 프로그램 개발 및 적용….”

31일 ‘여성흡연 어떻게 줄일 것인가’를 주제로 열린 국회토론회에서 한국산업간호협회가 제시한 직장 내 여성흡연자를 위한 정책제안 중 일부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성역할’이라고 함은 아마도 출산과 육아일 것이고, ‘맞춤형 다이어트’는 강박적인 아름다움을 강요당하는 모습을 반영한 듯하다.

물론 여성흡연의 실태는 참담했다. 이날 협회가 발췌한 대한신경정신의학회의 학술발표에 따르면, 흡연자 가운데 여성이 우울증을 경험하는 비율은 28.4%로 남성(6.7%)에 비해 현격히 높았다. 자살충동도 여성 흡연자는 35.1%로 남성(12.4%)의 3배다. 여성 비흡연자와 비교해도 우울감(28.9%/17.1%)이 높게 나타났다.

흡연이 자궁외 임신을 2.2배, 주산기 사망률을 2.16배 높고, 흡연 산모에게서 태어난 유아는 호흡기 질환에 걸릴 위험이 높다고 밝힌 한국건강증진재단의 ‘금연길라잡이’ 내용도 제시됐다. 

그런데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이 담배를 피우는 여성을 계도해서 해결이 가능한 일인지는 의심스럽다.

여성 흡연자에 대한 인식을 짚어보자. 지난해 8월 충북 청주시의 한 주택가에서는 길을 가던 20대 남성이 담배를 피우던 20대 여성 3명을 폭행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여자가 흡연하는 모습을 보기 싫다는 것이 폭행의 이유였다. 이 사건을 보도한 기사에는 ‘맞아도 싸다’는 식의 댓글이 달렸다. 또 예능프로그램에서는 여자연예인의 흡연 여부가 웃음거리로 소비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그러면서 사회는 여성 흡연자에게 소위 ‘드센 여자’역할을 맡거나 숨을 것을 암묵적으로 강요한다.

비흡연자인 여성도 ‘담배의 위협’에서 안전하지 않다. 2015년 기준 우리나라 남성 흡연율은 31.4%로 OECD 국가 중 최고 수준인 반면, 여성 흡연율은 3.4%에 불과하다. 과소추계 가능성을 감안해도 성별 격차가 크다. 지난2016년 7월 서울 은평구에서는 유모차에 아기를 태운 엄마가 50대 남성에게 담배를 꺼줄 것을 요청했다가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간접흡연 피해는 말할 것도 없고, 같은 흡연에도 성별 권력이 녹아있다. 

무한경쟁이 벌어지는 직장에서조차 끊임없이 ‘언젠가 아이를 낳을 몸’임을 확인받고, 미디어는 여성에 언제나 날씬할 것, 아름다울 것을 부추긴다. 거기에 많은 여성들이 저임금, 저고용, 비정규직 등 열악한 노동환경에 놓여있다. 이러한 사회에서 여성 흡연자의  정신적·신체적 건강이 좋을 리 없다. 

이날 토론회에서 전문가들은 ‘여성 금연’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여성흡연에 따라붙는 부정적 인식은 여성의 금연 시도조차 어렵게 한다.

즉, 본질은 흡연을 숨기게 만드는 분위기다. 여성들에게 임신·출산 위험이나 흡연의 폐해를 강조하는 것, 흡연 대신 이용할 다이어트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것, 대학이나 사업장에서 이뤄지는 여성 맞춤형 금연교육 등은 근본 해결책이 아니다.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숨어야하는 여성 흡연자의 삶을 더 비참하게 만들 뿐이다.

흡연이 주는 효용은 순간의 해방감이다. 그리고 그 해방감은 억압이 클수록 가치가 높아진다. 정말 여성 흡연을 줄이고자 한다면 사회 각 분야에서 여성에 대한 억압을 없애는 것이 우선이다. 여성의 인권을 높이고, 여성들이 처한 열악한 노동환경을 개선해야 한다. 여성 맞춤형 금연교육과 금연프로그램은 더 이상 흡연이 어떤 여성에게도 ‘문제’가 아닐 때 비로소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전미옥 기자 romeok@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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