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출산 '치매' 발병 위험 높인다…'경구피임약'으로 예방할 수 있을까

임신·출산 '치매' 발병 위험 높인다…'경구피임약'으로 예방할 수 있을까

기사승인 2018-08-13 10:21:18

여성의 출산 및 유산 경험이 나이가 든 후 알츠하이머병 위험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특히 출산 경험이 5회 이상인 여성의 경우 출산 경험이 1~4회인 여성보다 알츠하이머 병을 앓게 될 확률이 70%나 높으며, 유산을 경험한 여성의 경우 유산한 적 없는 여성에 비해 알츠하이머에 걸릴 위험이 절반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번 연구 결과는 미국의 저명 의학저널 신경학(Neurology)지 2018년 7월 판에 실렸으며, 게재 직후 CNN, BBC, Times, Newsweek, Telegraph 등 주요 외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알츠하이머병(치매를 일으키는 가장 흔한 퇴행성 뇌질환)의 발병 위험이 높고, 통상적으로 병리 소견에 비해 증상도 심하게 나타난다. 여성만의 고유한 경험인 임신 및 출산 시 겪게 되는 급격한 성호르몬 변화가 알츠하이머병의 발병 위험을 높일 수 있고, 이에 따라 임상 양상의 남녀 차이에도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성호르몬의 적절한 증가는 뇌신경을 보호하는 효과가 있지만, 임신 및 출산 시 겪게 되는 에스트로겐, 프로게스테론 등의 급격한 변화는 오히려 알츠하이머병 위험을 높일 가능성이 있다.

임신, 출산뿐만 아니라 유산을 경험할 때도 성호르몬 변화를 겪는데, 각각의 경우에 성호르몬 농도의 변화 양상이 다르기 때문에 출산과 유산이 알츠하이머병에 미치는 영향은 상이하다. 하지만 그간 출산과 유산이 알츠하이머병 위험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 조사한 연구는 흔치 않았다. 이에 김기웅 교수 연구팀(공동 제 1저자: 배종빈 임상강사)은 국내 60세 이상 여성 3574명을 대상으로 여성의 출산과 유산 경험이 노년기 알츠하이머병 위험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조사했고, 그리스 연구팀과 협력해 65세 이상 그리스 여성 1074명의 자료를 추가하여 서양 여성 데이터까지 연구에 포함시켰다.

연구팀은 출산과 유산이 여러 인구학적 요인, 만성 질환, 그 외 생식 관련 경험 등과 연관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자궁 혹은 난소 적출 수술을 했거나 현재 호르몬 대체 요법을 받고 있는 여성은 분석 대상에서 제외해 총 3549명의 데이터를 분석했다. 나이, 교육정도, 경제수준, 직업, 만성질환(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우울 증상, 폐경 나이, 생식 기간, 모유 수유, 과거 호르몬 대체 요법 여부 등의 요소를 통제하여 분석했다.

 

연구 결과, 5회 이상의 출산 경험이 있는 여성은 출산 경험이 1~4회인 여성에 비해 알츠하이머병 위험이 70% 높게 나타났다. 또한 유산을 경험한 여성은 이를 경험하지 않은 여성에 비해 알츠하이머병 위험이 절반에 그친 것으로 밝혀졌다. 한국 여성과 그리스 여성을 각각 분석했을 때도, 출산과 유산이 알츠하이머병 위험에 미치는 영향은 유사한 경향성을 보였다.

이에 더해 연구진은 치매가 아닌 여성들에서도 출산과 유산이 인지능력에 영향을 미치는지 조사하기 위해, 간이정신상태검사(MMSE)를 실시했다. 그 결과, 5회 이상 출산을 경험한 여성의 점수가 1~4회 경험한 여성에 비해 낮았으며, 유산을 경험한 여성이 그렇지 않은 여성에 비해 점수가 높았다. 치매까지 발전하지는 않더라도 5회 이상의 출산은 인지기능을 떨어뜨리고, 반대로 유산 경험은 인지기능을 높인다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다. 

연구팀을 이끈 김기웅 교수는 이번 연구 결과에 대해 “신경을 보호하는 효과가 있다고 알려진 에스트로겐의 혈중 농도는 임신 후 점진적으로 증가해 임신 전 대비 최대 40배까지 올라가고 출산 후에는 수일 만에 임신 전의 농도로 돌아오게 된다”며 “실험실 연구 결과, 지나치게 높은 농도의 에스트로겐은 오히려 신경 독성을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갑작스런 에스트로겐의 감소 또한 신경 독성을 유발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여러 번의 출산으로 이와 같은 급격한 호르몬 변화를 반복적으로 겪는 것은 뇌 인지기능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며 “이에 비해, 주로 임신 초기에 일어나는 유산 시기에는 에스트로겐이 경미하게 증가한다. 이 시기에 일어나는 경미한 여성호르몬의 증가가 뇌세포를 보호해 알츠하이머 발병 위험을 줄여주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아직까지는 경구피임약이나 호르몬 대체 요법 등으로 임산부들의 급격한 호르몬 변화를 막을 수 있는지, 이를 통해 알츠하이머를 예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들은 없다”며 “다만 임친 초기 때처럼 호르몬 변화를 조절할 수 있도록 하는 등 방법을 고도화해서 임상시험을 해볼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김 교수는 “국내에서는 60세 이상 여성의 다섯 명 중 한 명이 5회 이상의 출산 경험이 있는 실정이다. 이런 여성들은 알츠하이머병에 걸릴 위험이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인지기능 평가를 실시하고, 규칙적 식사와 운동, 인지능력 증진 훈련 같은 예방법을 적극 시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이번 연구는 보건복지부와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의 지원을 받아 질환극복기술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수행된 한국인의 인지노화와 치매에 대한 전향적 연구(Korean Longitudinal Study on Cognitive Aging and Dementia; KLOSCAD/과제번호: HI09C1379)의 산출물이다.

유수인 기자 suin92710@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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