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엔 길쭉한 킹크랩처럼 모두들 단단하게 쭉쭉 뻗어 나갔으면 합니다.”
31일 자정 무렵 서울 동작구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만난 상인 김옥순(71)씨. 두꺼운 외투를 입고 고무장갑을 낀 채 수산물들을 손질하는데 분주하다. 동장군의 위세에 실내에서도 손과 귀가 얼어붙는 날씨지만 김씨의 손길에선 따스한 정성이 묻어난다. 이내 새벽 장사를 위한 진열이 다 끝난 듯 좁디좁은 매장 한 켠에 몸을 기댔다.
“내가 인터뷰는 무슨..”이라며 손사래를 친 그였지만 이내 따뜻하게 말을 받아줬다. 올해 마지막 날을 맞아 점포를 찾는 손님이 꽤 늘었다며 김씨는 웃었다. ”수산물 파는 일로 아들 둘과 딸 하나 대학 공부도 시키고 결혼도 시켰어. 삶의 대부분을 이곳 노량진에서 보냈다“며 소리 내 웃었다.
김씨가 처음 수산물 장사를 시작한 것은 1970년대 무렵. 노량진 수산시장의 탄생과 그 궤를 같이 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경남 산청에서 태어나 부산서 남편과 결혼한 뒤 서울로 올라온 것이 26살 때다. 무작정 상경해 처음엔 할 것이 없어 막막했다고 한다. 이후 여러 장사를 거치며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터를 잡은 지 어느덧 38년이 흘렀다.
처음에는 점포 자리도 마땅히 없었던 데다 장사도 뜻대로 되지 않아 남몰래 시장 화장실을 옮겨 다니며 눈물도 많이 훔쳤다고 한다. 김씨는 “당시 세상살이가 참 힘들다고 느꼈다”면서 정식으로 자리를 잡고, 수족관을 들여 전복을 내다 놓기 시작한 순간을 이야기할 때가 되자 “너무 기뻐서 지금도 잊을 수 없지!”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처음에는 전복과 대게 등을 주로 팔다가 2년 전부터는 킹크랩도 팔고 있다. 김씨는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자식들을 길러내고 가족을 지킬 수 있었던 건 모두 이 수산물 덕”이라며 수족관에 담긴 활어와 킹크랩을 바라봤다. 누군가에겐 그저 비린내 나는 생선일 수 있지만 그에겐 가족과 삶을 지탱할 수 있게 해준 참 고마운 존재다.
단골손님이 멀리서도 이곳을 찾는 이야기, 과거 노량진 수산시장에 유명인이 방문해 들썩들썩했던 이야기를 할 때면 그의 뿌듯한 마음이 그대로 전해졌다. 김씨는 “유명 고추장 광고를 이곳에서 찍었는데 거기에 나갔던 적도 있다”며 “탤런트 서세원이나 HOT 등 연예인을 보기도 했다”고 허허 웃었다.
물론 장사를 이어오며 속상한 일도 많았다고 털어놨다. 반말을 내뱉는 예의 없는 청년들부터 술 주정을 하는 손님까지, 특히 수산시장은 사람들이 거칠고 온갖 손님을 상대해야 하다 보니 ‘단단함’이 없었다면 버티기 힘들다고 말했다. 그는 “장사를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겪었다”면서 “치열한 세월 속에 자연스레 마음이 단단해져 온 것 같다”고 미소 지었다.
손님들에 대한 부탁의 말도 조심스럽게 꺼낸다. 시장 상인들이 손님들을 속인다는 말에 무척 속이 상한다고 김씨. 장사를 해온 것이 38년인데 신뢰가 없었다면 이 시간을 버텨올 수 있었으랴. 그는 “부단히 노력하는 정직한 상인들이 대부분”이라며 “손님들이 상인들을 조금 더 믿어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현재의 노량진 수산시장에 대한 목소리도 냈다. 그는 “무료 주차가 10분밖에 안되는데 1시간 정도는 해줘야 하지 않을까”라며 “손님들이 편해야 상인들도 좋은 것 아니겠나”고 웃었다. 또 “2년 전 새로 지어진 지금 신시장은 장사할 공간이 협소하다”며 한 명이 앉기도 비좁은 매장 점포에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끝으로 2019년 새해 덕담도 잊지 않았다. “힘들어도 꾸준히 무엇인가를 이어가다 보면 기회가 생기고 길이 열리는 게 우리네 삶”이라며 “모두들 힘들어도 이 킹크렙처럼 단단하게 앞으로 쭉쭉 치고 나가 건강히 잘 살아주면 좋겠다”며 환한 웃음으로 새해 소망을 전했다. 치열히 살아온 노(老) 상인의 삶 앞에서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한전진 기자 ist1076@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