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임상심리학회가 진료 중 환자의 갑작스런 공격에 유명을 달리한 故 임세원 교수 사건을 계기로 정신건강현장 전문인력들에 대한 안전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8일 학회에 따르면 병원 폭력사건은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이다. 미국의 경우 2012년에 침상 100개당 2건의 폭력사건이 발생했던 것이 3년 후인 2015년 2.8건으로 증가했고, 매해 정신건강인력이 근무지에서 살해되는 사건은 평균 1건씩 발생하고 있다.
정신건강 현장에서는 환자의 치료와 회복을 위해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간호사, 정신건강임상심리사, 정신건강사회복지사 등의 전문 인력들이 협업을 하고 있는데, 신체적 폭력과 스토킹, 협박과 성희롱, 욕설과 같은 정신건강전문인력이 경험하는 안전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으며 그 빈도와 심각도는 더욱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 학회측 설명이다.
학회는 “정신건강 현장에서 폭력의 위험성이 존재하는 것이 임상가들 사이에서는 주지의 사실이었으나 그동안 이것이 공론화되지 않았다”며 “그 이유 중 하나는 폭력의 가해자가 환자 혹은 내담자인 경우가 대부분이라 치료진들이 폭력의 가해자를 돌보아야 할 대상으로 살펴왔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또 “가해자의 폭력 행위가 악의적인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정신질환과 관련된 증상의 일부인 점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기도 했다. 더욱이 신뢰와 공감을 원칙으로 환자를 치료하는 정신건강전문인력들이 환자나 내담자를 잠재적 위험군으로 보는 것을 불편해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학회는 “그러나 이번 사건의 경우는 그간의 이런 소극적 보호가 결국 폭력을 가한 환자와 그 환자의 주치의와 그 환자의 주치의가 돌볼 수 있었던 수많은 환자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게 했기에, 이제부터의 병원 내 폭력에 대한 대처는 사건 이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야 한다는 것에 대중과 정신건강전문인력의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며 “다소 폐쇄적인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심리평가 및 치료의 특성상 정신건강전문인력은 불의의 공격에 취약하다”고 지적했다.
특히 폭력이 발생할 경우 당사자는 물론, 병원 내 다른 동료들에게도 트라우마가 될 수 있으며, 이는 치료진의 직무 만족도 저하, 소진과 잦은 이직으로 인한 서비스 질 저하, 다른 환자들이 치료받을 기회를 빼앗는 이차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학회는 “지금까지 위험관리체계가 시설물이나 환자의 안전에 주로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번 사건을 계기로 치료진들이 업무상 경험하는 폭력과 관련된 안전 대책에도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학회는 병원 내 폭력에 좀 더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병원 내 폭력의 특수성을 고려한 사전 예방 교육과 물리적 대피로의 확보 ▲개인과 조직차원의 적극적인 대응 ▲법과 제도의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먼저 교육 및 수련 과정에서 근무환경에서 발생할 수 있는 폭력에 대한 정기적인 대처 교육이 필요하며, 여기에는 잠재적 폭력의 신호를 민감하게 알아차리고 상대의 정서적 흥분을 감소(de-escalation)시키는 대화기법과 비폭력적 자기방어 기술 등의 안전 가이드라인이 포함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폭력의 잠재성이 있는 환자에 대한 체계적인 위험 평가를 실시하고, 이 경우 2인 1조로 혹은 안전요원과 함께 대면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필요 시 무기가 될 수 있는 물건을 제거하고, 사전 약속된 위험 신호나 비상벨 등의 경고 장치를 활용하는 등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따른 대응도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또 업무상 폭력 피해를 입은 경우, 후유증을 최소화할 수 있는 법적,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함을 지적했다. 학회는 “업무상 경험한 폭력에 대해 가해자에게 보상 책임을 묻기 어렵다면, 공공영역에서 보상 및 지원 체계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며 “피해 당사자의 병가를 인정하고, 필요시 치료 및 상담, 법적 처리를 지원하는 등 기관의 직원보호가 제도적으로 뒷받침돼야 한다는 점 역시 신중히 논의돼야 할 사안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폭력은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며 “다만 환자의 안전을 위해 입원 절차의 간소화, 집중적 치료와 강제적 치료 명령이 필수적이라는 정신건강전문가들의 입장과, 인권침해적 요소를 우려하고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려는 입장 사이에 간극이 존재한다면, 이를 공론화하여 간극을 좁힐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故 임세원 교수의 유지에 따라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편견과 차별 없이 언제든 쉽게 도움을 받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지속적으로 안전한 치료 환경 구축을 위해 사회 전반의 다각적인 노력과 제도 마련이 절실하다”며 “삼가 故 임세원 교수의 명복을 빈다”고 전했다.
유수인 기자 suin92710@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