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만세 소리가 울려퍼지고, 자그마한 태극기와 선언서가 하늘에서 내리는 꽃비처럼 쏟아졌다. 모인 사람들은 모자를 벗어 허공에 던지며 미친 듯이 기뻐하였다. 이때, 성안과 지방의 백성들도 합세하여 수십만의 군중이 참여하였다. (중략) 시위행진은 서울을 8개 구로 나누어 길을 가면서 독립선언서를 나눠주고 ‘일본군과 일본인은 일본으로 돌아가라’, ‘조선독립만세’, ‘조선 독립정부를 수립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 3·1운동이 올해 백 주년을 맞았다. 3.1운동은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등장할 만큼 우리 역사의 중요한 ‘이정표’다. 광복이라는 결실을 맺기까지 우리 조상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투쟁했다.
1919년 3월1일, 만세시위를 주도한 것은 학생들과 일반 시민이었다. 이날 민족대표 33인은 서울 중구 탑골공원에 나타나지 않았다. 유혈사태가 일어날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여명의 학생들과 시민들은 단념하고 발걸음을 돌리지 않았다. 한 청년이 팔각정으로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소리 내어 읽었다. 독립선언서가 울려퍼진 뒤 만세시위가 시작됐다.
학생들은 무모하리만큼 용감했다. 당시 일제는 태극기의 사용과 소지를 금지하고 있었다. 집회와 단체 운동 역시 일절 금지됐다. 그러나 학생과 시민들은 보란 듯 태극기를 들었다. 말을 타고 총칼로 무장한 일본 헌병들 앞에 학생들은 맨몸으로 맞섰다. 친일파 윤치호는 이 모습을 보고 자신의 일기에 “소년들은 모자와 손수건을 흔들었다. 이 순진한 젊은이들이 애국심이라는 미명 하에 불을 보듯 뻔한 위험 속으로 달려드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중략) 곧바로 군인, 기마, 경찰, 형사, 헌병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고 적었다.
3.1운동은 학생들의 협조와 치밀한 계획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경성고등보통학교, 연희전문학교, 보성 법률상업전문학교 등에 재학 중이던 학생들은 2월 초부터 미리 독립선언서 100~300매씩을 비밀리에 각 학교에 교부했다. 또 탑골공원에서 대한독립 선언이 있을 것이라는 소식을 널리 알리고 참여를 독려했다. 3.1운동이 단발성에 그치지 않도록 대비책을 마련한 것도 학생들이었다. 학생들은 3월1일, 5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학생 지휘부를 2선까지 꾸렸다. 또 이들은 1선이 체포되면 2선이 맡아 거리 시위를 이어간다는 계획을 세웠다.
경성고등보통학교 3학년생 김백평은 이날 재학생들을 진두지휘, 탑골공원으로 이끌었다. 학생들은 3월3일 열릴 예정이던 고종 장례식 참여 연습이 끝나고 교실로 들어가려던 중이었다. 김백평은 쏜살같이 교정 연단에 올라가 ‘전교생 차렷! 지금부터 내 구령으로 행동한다. 1학년 갑조부터 앞으로 뛰어 갓!’이라고 외쳤다. 연희전문학교 대표 김원벽은 1일에 이어 5일 열린 2차 만세시위에서 군중 선두에 섰다. 김원벽은 남대문 역전에서 인력거를 타고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을 흔들며 시민을 이끌었다. 그러다 그는 일본 경찰에 붙잡혀 빗장뼈가 부러지기도 했다.
학생들은 3.1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옥고를 치르고 퇴학당하는 등 고초를 겪었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3.1운동으로 촉발, 석 달간 진행된 독립운동으로 7509명이 사망했다. 부상자는 1만5961명에 달했다. 지난 2007년 역사문제연구소가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3.1운동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이들의 죄목은 71%가 보안법 위반, 21%가 소요죄였다. 41%가 6개월 이상에서 1년 미만에 옥살이를 경험했고, 태형(죄인의 볼기를 치는 형벌)에 처해진 이도 21.4%나 됐다. 특히 여학생들의 고초가 심했다. 일제는 여학생들이 시위에 가담했다는 이유만으로 옷을 벗겨 폭행했고, 고문으로 수치심을 줬다. 강간을 당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3.1운동은 시작일 뿐이었다. 학생들은 품속에 독립선언서를 숨기고 고향에 내려가 독립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켰다. 대표적인 인물이 유관순 열사다. 유관순 열사는 3월13일 사촌언니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품고 고향인 천안에 내려가 연기, 청주, 진천 등에 위치한 교회와 학교를 돌아다녔다. 유관순 열사는 서울에서 벌어지고 있는 만세운동을 설명하고 동참을 호소해 결국 4월1일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다.
종로구 필운동에 위치한 배화여학교에서는 15살에서 19살의 여학생들이 3.1운동 1주년 만세운동을 벌였다. 일제는 3.1운동 1주년을 앞두고 살벌한 경계태세를 갖춘 상황이었다. 어린 학생들은 굴하지 않았다. 1920년 3월1일 학생 수십 명은 학교 기숙사 뒷산과 교정에서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쳤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옥고를 치른 이도 여럿이었다. 국가보훈처는 지난해 김경화, 박양순, 성혜자, 소은명, 안옥자, 안희경 등 공적과 옥고가 확인된 6명에 대통령표창을 수여했다. 이들은 98년 만에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았다.
소설 ‘상록수’ 작가로 알려진 심훈(본명 심대섭) 역시 3.1운동에 참석한 뒤에도 끊임없이 투쟁을 전개한 인물 중 하나다. 심훈은 경성고등보통학교 4학년 재학 중, 3.1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투옥됐다 결국 퇴학당했다. 그는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이시형, 신채호 같은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했다. 또 6.10 만세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한 시 ‘통곡 속에서’와 일제강점기 대표적 저항시 ‘그날이 오면’ 등을 지었다. 경성방송국 조선어 아나운서로 일할 당시에는 일본 천황과 관련된 구절을 고의로 빼먹어 3개월 만에 쫓겨나기도 했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19살 청년 심훈이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내용 일부다.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운 나라를 지키려는 마음에 나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머님! 어머님께서는 조금도 저를 위하여 근심치 마십시오. 지금 조선에는 우리 어머님 같으신 어머니가 몇 천 분이요 몇 만 분이나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머님께서도 이 땅에 이슬을 받고 자라나신 공로 많고 소중한 따님의 한 분이시고, 저는 어머님보다도 더 크신 어머님을 위하여 한 몸을 바치려는 영광스러운 이 땅의 사나이외다”
정진용 기자 jjy4791@kukinews.com/ 사진=박효상 기자 tina@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