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산, 강경, 목포 지역 ‘3.1운동 유적지’와 일제 수탈 현장을 찾아서-
- 삼남(영남, 호남, 충청) 지방 최초 만세운동을 벌인 군산을 시작으로 강경, 목포 3회 연재-
- 어둡고 아팠던 역사, 되짚어보고 추념하는 ‘다크투어(Dark Tour)’ 주목-
- 치욕의 역사, 다음 세대들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
올해는 일제의 폭압적 식민 지배에 맞서 전 민족이 분연히 일어선 3.1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다. 또한 국내 저항운동만으로는 독립이 쉽지 않음을 깨닫고 중국 상해에 세운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과거를 돌아보고 기억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픈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역사학자들은 말한다.
쿠키뉴스는 3.1운동 백주년을 맞아 당시 일제의 쌀 수탈을 비롯해 경제 수탈이 극심했던 군산/익산, 목포, 강경/논산 지역을 찾았다. 항일 운동의 역사적인 장소와 비록 일본식 건축물이긴 하지만 우리 땅에서 캔 흙과 돌, 나무와 선조들의 노동력을 착취해 지은 ‘적산가옥’을 돌아보았다. 적산(敵産)은 뜻 그대로 해석하면 ‘적국의 재산’이다. 일본인들이 두고 간 적산가옥들은 해방 후 미군정이 소유로 있다가 우리 정부에 귀속된 후 일반에게 불하했다. 14일 취재팀은 시간을 거슬러 당시 일본인들의 거주공간을 체험해보기 위해 군산의 일본식 숙박시설인 료칸 ‘여미랑’에서 하룻밤을 청했다.
“역사는 흘러간 과거가 아닌 우리의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다.”
1930년대 일본인들이 우리나라 땅을 자기나라 땅 인양 건물을 짓고 거주했던 공간에서 서러웠던 시대의 아픔을 되새겨 보고자 한다. 여관 입구에 붙어 있는 안내 간판의 문구가 “고통의 시간은 그대로 기억하면서 같은 길을 두 번 가지는 말아야겠다.”는 이번 기획취재 의도를 한 번에 정리해 주는 듯 했다.
1993년 故 김영삼 대통령은 경복궁 되살리기 운동 및 문민정부의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구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를 지시했다.
그 당시에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하던 총독부 건물은 철거와 보존의 양론으로 국민 의견은 극명하게 갈렸다.
하지만 광복 50년을 맞은 1995년 8월 15일 식민통치의 본산이었던 ‘구 조선총독부’ 건물은 철거를 시작해 이듬해 11월 마침내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4년의 설계와 10년간의 공사 끝에 1926년 완공한 근세 르네상스식 조선총독부 건물은 한때 아시아를 대표하는 중후하고 아름다운 건축물로 평가 받기도 했다.
“우리민족의 자존심과 민족정기의 회복을 위해서 역사의 흉터인 건물을 조속히 해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힌 문민정부의 김영삼 대통령과 “기억을 잃은 도시엔 미래가 없다. 당시 결정은 야만적인 일이었다.”고 후일 건축가 승효상 씨는 아쉬움을 말했다.
과연 일본인들이 우리 땅에 남겨놓고 떠난 100년 안팎의 일본 근대건축물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35년의 일제 강점기간 형무소와 경찰서 안에서 수많은 애국지사가 고문을 당했고 그들이 세운 척식회사와 은행의 금고, 항구의 대형 창고 안에는 우리 선조들의 고혈을 짜내어 수탈한 엄청난 부가 얼마나 쌓여 있었을까. 고통과 치욕의 시간들을 견디어 내야만했던 선인(先人)들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지면서 아득하고 무거운 침잠이 이어졌다.
-굴욕의 공간과 시간도 우리가 곱씹고 보존해야 할 역사-
누구에게나 부끄럽고 치욕스러운 과거는 기억 속에 조차 담아두고 싶지 않는 지움의 대상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 어둡고 아팠던 역사도 꼼꼼히 되짚어보고 추념하는 ‘다크투어(Dark Tour)’가 주목 받고 있다.
비극적 역사의 현장이나 커다란 재난과 재해가 일어났던 곳을 돌아보고 체험하면서 반성과 교훈을 얻기 위하여 떠나는 여행을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 혹은 블랙 투어리즘(Black Tourism) 이라고 한다. 국립국어원에서는 ‘역사교훈여행’으로 우리말로 다듬었다.
스페인 출신 미국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는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같은 역사를 다시 살게 된다.’고 말했다.
대표적 다크 투어리즘 장소로는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비롯해 9.11테러가 발생했던 뉴욕 월드트레이드센터 부지인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 약 200만 명의 양민이 학살된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유적지 등을 꼽을 수 있다.
한국의 대표적 다크 투어리즘 장소는 제주 4·3사건의 실상을 알려주는 제주4·3평화공원을 비롯하여 국립5·18민주묘지, 거제포로수용소,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비무장지대(DMZ),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제주도 알뜨르 비행장, 전남 목포 신항의 세월호 선체 등이 있다.
‘왠지 미워보였던 왜식 건물’ 정도로만 취급받던 적산가옥들이 새롭게 ‘역사교훈상품’으로 주목 받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역사도 역시 우리 역사이기에 ‘네거티브 헤리티지(부정적 문화유산)’로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 가면서다.
적산가옥이 많이 남아 있어 도시재생사업으로 새롭게 태어난 군산, 목포, 영주, 구룡포 등 각 지역의 근대역사문화거리가 대표적 ‘다크투어리즘’으로 관광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적산가옥은 자기 부모나 조부모가 살았던 흔적을 찾아 일본인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다고 안내를 맡은 군산시 신경애 문화관광해설사는 귀뜸한다.
문화재위원인 안창모 경기대 교수는 “적산가옥은 당시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현장이다. 당연히 적산가옥은 보존가치에 따라 지정문화재 혹은 등록문화재로 잘 관리해야한다. 종종 본래 취지에 벗어나 고증 없이 국적불명의 형태로 건물을 보수하거나 신축해 관광상품화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면서 일부 적산가옥 철거 여론에 대해서는 “적산가옥은 해방 이후 미처 청산하지 못한 친일 문제와 연결돼 있다. 식민지 문제 관련 세계의 사례를 보면 인적 청산은 하고 물적 청산은 남겨서 후대에 교훈으로 삼는다.”면서 “우리는 인적 청산을 제대로 못 한 역사 때문에 물적 청산이라도 해야 한 것 같이 보이는 일종의 식민지 콤플렉스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안 교수는 “아직도 일본이 일제강점기의 수많은 과오를 반성하지 않는데 그들의 침략 증거를 우리 스스로 없앨 필요는 없다. 눈에 안보이면 잊혀진다. 유태인의 경우 홀로코스트 뮤지엄(Museum of the Holocaust)을 세계 곳곳에 만들어서 나치의 만행을 알리고 후손들에게는 생생한 역사 교육 현장으로 삼고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과 일본은 겉으로는 우방국이지만 뿌리 깊은 역사 문제로 인해 가깝고도 먼 나라다. 그들은 위안부 문제나 강제징용 등 일제강점기의 과오를 반성할 생각이 없다. 일본은 과거 문제를 이미 청산했다는 입장이며, 한국이 오히려 과거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한다고 억지주장을 펼친다. 아직도 군국주의 부활을 꿈꾸며 군사력 확장에 힘을 쏟는 일본을 바라보며 3.1운동 백주년을 맞아 가족과 지인과 함께 역사의 현장을 돌아보는 것도 유의미한 일이다.
쿠키뉴스는 일본의 쌀 및 소금, 면화 등 경제 수탈이 특히 심했던 군산지역을 첫 번째로 강경지역, 목포지역을 차례로 소개한다.
군산의 3.1운동사
-한강이남 최초의 만세운동 발상지-
-1919년 3월 5일, 일경의 허 찌르고 분출한 희망과 의지의 함성-
“경성에서는 고종의 국장일을 기해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곳 군산에서는 아무 움직임이 없는지요?”
1919년 2월 26일 군산 영명하교 졸업생이자 세브란스의전에 다니던 김병수는 영명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던 이모부 박연세를 만나 경성의 상황을 전달했다. 기독교와 천도교를 중심으로 독립만세운동을 준비 중이며, 자신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갑성(당시 세브란스병원 근무, 서울 남대문교회 집사)으로부터 군산지역 연락책임자로 임명됐다고 소개했다.
조카이자 제자인 김병수는 박연세에게 독립운동 참여를 다짐받고 경성에서부터 숨겨온 독립선언서 90여 장을 건넸다. 박연세는 “경성에서 독립운동이 벌어진다면 이곳에서도 동시에 운동을 개시하겠다.”고 화답한 뒤 이두열을 비롯한 교사들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여 거사를 모의했다. 삼남(영남, 호남, 충청) 지방 최초의 만세운동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박연세 교사 등은 3월 6일 군산 서래 장날을 거사일로 잡고 준비에 나섰다. 구암동산 아래 영명학교 남학생들과 영명학교 바로 옆에 위치한 멜본딘여학교의 학생들, 같은 선교재단인 구암예수병원의 직원들도 동참을 약속했다. 학생들은 학교 지하실과 기숙사 2층 다락방에서 독립선언서 수천 장을 복사했고 일본인 선생들의 눈을 피해가며 태극기도 만들었다.
그러나 돌연 3월 5일 새벽 군산경찰서의 일본인 무장경찰 수십 명이 출동해 주모자인 박연세, 이두열, 김수영, 고석주, 송정헌 등을 구인하면서 만세운동은 좌절 위기에 놓인다.
하지만 교사 김윤실이 교사들과 학생들을 긴급 소집해 5일 오후 일경의 허를 찔러 거사를 벌인다.
영명학교와 멜본딘여학교 학생들, 병원 직원, 구암리 주민 등 백여 명으로 시작한 시위대가 군산 본정(本町) 거리에 이를 때쯤에는 만세운동 참여자가 500여 명으로 크게 불어났다. 시위대는 군산경찰서까지 진출한 뒤 체포 교사 석방과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예상치 못한 시위와 시위대 규모에 크게 당황한 일경은 인근 익산 헌병대까지 동원한 뒤 무차별 총격과 함께 시위대 탄압에 나섰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않고 군산지역의 만세운동은 5월까지 이어졌다.
군산의 3.5만세운동은 총 28회(31,500여 명 참여/ 피살자 53명/ 부상자 72명/ 투옥자 195명)로 큰 상처를 남겼지만 일본이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바꾸는 계기가 됐고 자주독립의 의지와 함께 호남지역과 인근 충청지역 독립운동의 불씨가 되었다.
군산의 만세운동 유적지와 일본 근대건축물
-100년 전 그 날을 만나다, 군산 3.1운동 100주년 기념관-
-쌀 수탈로… 일본인에겐 황금도시, 조선인에겐 눈물도시-
-일제 상흔 고스란히, 철거 대신 보존 택해 재생사업 지속 추진-
일제강점기, 열차와 전군가도(일본이 건설한 전주에서 군산 간 시멘트 포장도로)를 이용해 트럭에 가득 싣고 달려온 쌀가마니는 한국인 노동자들에 의해 군산항에 산처럼 쌓였다.
일본의 산미 증식 계획에 따라 호남평야에 생산된 쌀들은 군산항 쌀 창고에 언제나 가득했다.
그들은 본국의 쌀 수급계획에 맞춰 우리의 곳간을 열고 입맛대로 쌀을 실어날랐다.
군산은 목포와 함께 1899년 5월1일 개항 이후, 일제강점기 동안 조선과 호남의 토지와 쌀 등을 일본으로 수탈하는 중심 항구였다.
강점기 당시 군산은 일본인들에게 ‘기회의 땅’이었다. 땅은 비옥하고 땅값은 본국의 10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일본인들은 호남평야 일대 토지를 온갖 편법을 동원해 대규모로 사들인 뒤 쌀농사를 지어 막대한 부를 쌓았다.
이들 일본인 대지주들은 토지를 담보로 한 고리대금업을 통해 많은 한국 농민들을 소작농으로 전락시켰다. 토지를 빼앗긴 농민들은 일본인이 운영하는 농장이나 정미소의 잡부 혹은 쌀을 배에 실어 나르는 인부로 겨우 생계를 유지했다.
3·1 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에는 군산 인구의 절반인 약 6,800명이 일본인이었다. 군산지역에서 큰돈을 번 일본인들은 일본 경찰을 도와 만세운동 탄압에 적극 나섰다.
군산 내항 일대인 장미동, 월명동, 신흥동에는 지금도 일제강점기 당시 건축물들이 많이 남아있다. 군산시 마을 이름들 중 ‘쌀 미(米)’를 쓴 이름이 많다는 것 역시 가슴 아픈 역사의 흔적이다. 군산시 마을 이름들 중 ‘쌀 미(米)’를 쓴 이름이 많다는 것 역시 가슴 아픈 역사의 흔적이다.
① 군산 3.1 운동100주년기념관
전북 군산 금강 하구에 위치한 구암동산(해발고도 34m)에 3.1운동역사공원이 조성돼 있다. 이곳에는 2018년 6월 개관한 ‘군산 3.1운동 100주년 기념관’이 있다. 군산 3.5 만세운동을 이끈 영명학교 건물을 재현해 3층 규모(연면적 969.2㎡)로 건축했다.
3.1운동 백주년 기념관은 한강이남 최초의 3.1운동인 군산 3.5만세운동과 관련된 다양한 유물이 전시되어 있고 100년 전 그날의 역사 재현 및 다양하고 재미있는 나라사랑 체험활동을 할 수 있는 기념관이다. 평일과 주말 오전9시에서 오후 6시까지 개관하고 매주 월요일은 휴관이다.
기념관을 관람한 후 뒤편 계단을 오르면 충혼상징 조형물과 군산항, 군산하구언이 한 눈에 조망된다.
주소: 전북 군산시 구암동 358-2번지 구암동산 내 문의: 063-454-5940
② 호남관세박물관(구 군산세관 본관·전라북도 기념물 87호)
해망로 인근에 남은 근대문화유산 중 보존이 가장 잘 된 곳이 군산세관 건물이다. 1990년대까지 실제 세관 건물로 사용됐기 때문이다. 화강암 기초 위에 붉은 벽돌로 지어진 군산세관 건물은 국내에 현존하는 구 서울역사, 구 한국은행본점 건물과 함께 서양고전주의 3대 건축물 중 하나로 꼽힌다.
③근대건축관(구 조선은행 군산지점· 국가등록문화재 제374호)
1922년 신축한 은행 건물로 일제강점기 침탈적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대표적 은행이었다. 현재는 보수, 복원을 마치고 근대건축 모형 및 은행관련 자료 등의 전시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④근대미술관(구 일본 18은행 군산지점·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72호)
일본 나가사키에 본사를 두고 있던 은행으로 숫자 18은 은행설립 인가 순서를 의미한다. 쌀을 반출하고 토지를 강매하기 위해 1907년 개설하고 1914년 건립된 나가사키18은행은 현재 근대미술관으로 개관하여 미술작품 전시와 작가의 전시 공간으로 활용 중이다.
⑤ 부잔교(뜬다리)
해상물류의 중심지인 군산에 1899년 개항 이후 수출화물작업을 위해 수위에 따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뜬다리를 만들었다. 일제는 보다 효율적인 수탈을 위해 군산항에 이 같은 다리를 4개 만들었다. 현재는 다리 주변에 진포해양테마공원이 들어서 있다. 군산시 신경애 문화관광해설사(위 사진 안경쓴 이)는 “군산은 우리 국민 모두가 그들이 35년 강점기간 저질렀던 수많은 만행을 기억하는 역사의 산 교육장”이라며 “하지만 몇 십 년도 안 된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지만 뜬다리를 비롯 백년이 넘어도 튼튼한 그들의 건축물을 보면서 솔직히 우리가 배울 점도 있다.”고 말했다.
⑥ 미즈카페(구 미즈상사)
1930년대 무역회사와 상업시설로 활용된 근대건축물로 1층은 카페테리아, 2층은 북카페로 조성하여 시민과 방문객의 휴식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⑦동국사(국가등록문화재 64호)
동국사는 우리나라에 몇 개 남지 않은 일본식 사찰 중 하나이다. 동국사(東國寺)는 1909년 일본 승려 선응불관 스님에 의해 창건되어 일제 강점기 35년을 일인 승려들에 의해 운영되었다.
사찰 한 켠에 ‘평화의 소녀상’이 있다. 일제가 남기고 간 곳에 세워진 소녀상은 굳건하다. 소녀상 뒤편엔 일본불교종단이 세운 일제강점기의 만행을 참회하는 비석이 있다.
절의 시간 이야기하는 왕대숲
대웅전과 해방 이후 우리의 건축양식으로 지은 사찰을 벗어나 절 뒤편으로 걸어가자 왕대 숲이 나왔다. 말 그대로 굵직한 대나무 숲은 한민족의 고통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월이 흘러도 푸르고 푸르다. 대잎 사이로 스치는 바람에 풍경이 흔들린다.
⑧ 신흥동 일본식 가옥(구 히로쓰 가옥·국가등록문화재 제183호)
일제강점기 군산지역의 유명한 포목상이었던 일본인 히로쓰가 건축한 2층의 전통 일본식 목조가옥이다. ㄱ자 모양으로 붙은 건물 2채가 있고 두 건물 사이에 꾸며진 일본식 정원에는 큼직한 석등이 놓여 있다.
히로쓰는 대지주가 많았던 군산 지역에서는 보기 드물게 상업으로 부를 쌓은 사람이다. 일본인 지주의 생활상과 이들의 농촌수탈의 역사를 살펴 볼 수 있는 곳이다. 영화 ‘장군의 아들’, ‘타짜’ 등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⑨군산근대역사박물관
2011년에 개관한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은 "역사는 미래가 된다"는 신조로 과거 무역항으로 해상물류유통의 중심지였던 옛 군산의 모습과 전국에서 손꼽히는 근대문화자원을 전시중이다. 서해 물류유통의 중심지로 세계로 뻗어 가는 "국제 무역항 군산"의 모습을 보여주는 박물관이다.
⑩ 이영춘 가옥(전라북도 유형문화재 200호)
군산시 개정동에 위치한 이영춘 가옥은 현재 군산시에 남아 있는 일제 강점기 시절의 건물 중에서 가장 보존이 잘된 건물이다. 서구식, 일식, 한옥의 양식이 결합된 독특한 건축양식의 가옥으로 해방 이후 농촌보건위생의 선구자 쌍천(雙泉) 이영춘 박사가 거주했기에 이영춘 가옥이라 불린다.
일본인 농장주인 구마모토(熊本)가 1920년대에 건축하였는데, 건축 당시 조선총독부 관저와 비슷한 건축비를 들여 별장처럼 아름답게 지은 곳이다.
⑪임피역(국가등록문화재 제 208호)
군산선로 역사로 당시 농촌지역 소규모 간이 역사의 전형적 건축양식을 볼 수 있다. 1936년경 군산선의 철도역사로 건립되어 일제강점기에 전라남북도의 농산물을 군산항을 통하여 일본으로 반출하는 중요 교통로 역할을 담당하였다.
1995년 4월 1일 간이역으로 격하되었고 2008년 5월 1일부로 폐역이 되었다.
⑫ 여미랑(시대형 숙박체험)
여미랑은 군산시가 일제강점기시대 건축양식을 복원하여 2012년 월명동에 조성한 시대형 숙박체험관이다. ‘여미랑’ <悆(잊을 여), 未(아닐 미), 廊(사랑채 랑)>은 하룻밤 묵으면서 아픈 역사를 잊지 말자는 의미이다.
이 외에도 군산이 전북지역 최초 만세운동이 있었음을 알리고 역사 속 아픔을 배울 수 있는 ‘군산 항쟁관’, 군산지역 최초의 천주교 본당 건물인 둔율동 성당(국가등록문화재 제677호), 일제 강점기의 토목건축 형태를 살펴볼 수 있는 해망굴(국가등록문화재 제184호), 채만식문학관도 역사교훈여행 코스이다.
일제 강점기 익산 만세시위 이끈 문용기 열사
-일제의 만행 맞서 숭고한 죽음-
-4·4만세운동 주역 희생정신 기려-
군산에서 3.1만세운동유적지와 근대건축물을 둘러본 후 인근 익산을 찾아 4.4 만세운동의 주역 관재 문용기 선생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도 추천한다.
독립운동가 문용기 선생은 솜리(익산의 옛 지명) 남전교회(한국기독교 사적지 18호)의 장로로 1919년 4월 4일 정오 솜리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문용기 선생은 오른손에 태극기를 들고 군중 앞으로 나아가 독립운동의 정당성과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연설을 했다. 그러자 일본인 헌병이 칼을 휘둘러 문용기의 오른팔을 내려쳐 팔과 함께 태극기도 땅에 떨어졌다.
문용기 선생은 남은 왼손으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며 다시 전진했다. 헌병은 남은 왼팔마저 베어버렸다. 두 팔을 잃었지만 문용기 선생은 입으로 계속 만세를 외치자 일본 헌병이 온 몸을 사정없이 난자하였지만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독립만세를 외쳤다. “여러분! 여러분! 나는 이 붉은 피로 우리 대한의 신정부를 음조(陰助)하여 여러분으로 하여금 대한민국의 산 국민이 되게 하겠소” 마침내 문용기는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41세였다.
익산 남부시장 근처 ‘3.1독립운동 4.4만세기념공원’에 가면 그가 순국한 자리에 동상과 4.4 만세운동 순국열사비가 세워져 있다.
군산/익산 글·사진=곽경근 대기자 kkkwak7@kukinews.com 드론 촬영=왕고섶 사진가/ 취재 지원=신경애 군산시 문화관광해설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