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 엑소의 팬인 A씨는 지난 22일 공개된 엑소의 일본 투어 일정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투어 마지막 지역인 미야기가 후쿠시마 원전사고 장소와 약 130㎞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는 소식이 들려와서다. A씨는 “일본 불매 운동이 한창이라 현지 투어 소식에도 마음을 졸였는데, 미야기에서 공연한다니 걱정이 크다”고 했다. 일부 팬들 사이에선 ‘일본이 미야기 관광 사업 활성화를 위해 이 지역에 공연을 유치한 것’이라는 의혹도 나왔다. SNS상에는 해시태그 ‘#SM_엑소_미야기콘_취소해’를 단 글들이 쏟아졌다.
우리 대법원의 강제징용 보상 판결에 대한 일본의 보복성 수출 규제로 한일 관계가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소비재를 중심으로 퍼진 일본 제품 불매 운동의 불씨가 대중문화계로 옮겨가면서 연예계는 연일 살얼음판을 걷는 분위기다. 일부 기획사에선 소속 연예인들에게 ‘일본 여행 자제령’을 내렸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이달 초 배우 이시언이 지인 초대로 일본을 방문해 ‘인증샷’을 SNS에 올렸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은 뒤부터다. 최근에는 일본 여행을 다녀온 일반인들을 ‘박제’하는 SNS 계정이 생겨 논란이 빚어지기도 했다.
방송가에선 일본 관련 콘텐츠가 자취를 감췄다. 그동안 일본은 여행 예능 등 각종 TV 프로그램에서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 좋은 해외 촬영지로 각광 받아 왔지만, 일본 불매 운동이 거세지자 판도가 달라졌다. SBS 인기 예능프로그램인 ‘집사부일체’는 지난달 방송에서 일본 아오모리현 여행을 다뤘다가 질타를 받았다. 아오모리현은 우리 정부가 수산물 수입을 금지한 지역 중 한 곳인데, 이곳을 홍보하는 듯한 방송 내용이 국민 정서를 거스른다는 지적이 일었다. 제작진은 “출연자와 관련 있는 지역이라 촬영지로 선정했을 뿐, 협찬·홍보 목적은 없었다”고 해명하며 사과했다.
일본과 교류가 잦았던 가요계는 사정이 복잡하다. 한 가요 관계자는 한일 긴장 관계와 관련한 질문에 “상황을 지켜보는 중”이라며 말을 아꼈다. 온라인에선 ‘국내에서 활동하는 일본 국적 연예인들을 퇴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으나, 일본 불매 운동처럼 높은 지지를 얻진 못하고 있다. 하태경 바른미래당 의원은 이달 초 SNS에 “한국 편을 들어줄 가능성이 꽤 있는 국내 활동 친한파 일본 연예인들까지 우리의 적으로 만들어 어떻게 우리가 이길 수 있는가”라고 적으며 ‘일본 연예인 퇴출 운동’을 비판했다.
한국 연예인들의 일본 활동도 일단은 순항 중이다. 그룹 방탄소년단은 지난 3일 일본에서 발표한 싱글로 오리콘 차트에서 신기록을 세웠다. 올해 일본에서 음반을 낸 남성 가수 중 가장 높은 점수로 싱글 음반 발매 오리콘 주간 차트 정상에 오른 것이다. 트와이스는 오는 10월부터 내년 2월까지 12회 공연하는 일정의 아레나 투어를 연다. 앞서 언급한 엑소도 10~12월 10회에 걸쳐 아레나 공연을 개최한다. 위너, 블랙핑크, 세븐틴, 아이즈원 등도 일본에서 대규모 공연을 열고 있거나 열 예정이다. 일본 내 한류의 역사가 20년 이상으로 긴 데다가, 문화 소비가 SNS와 유튜브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김헌식 문화평론가는 “한국 연예인이 일본 대표적인 기업의 광고 모델로 활동하는 등의 일은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면서도 “다만 일본에 방문했다는 이유만으로 모욕을 주거나 국내에서 활동하는 일본 국적의 연예인을 퇴출하자는 건 타당치 않다”고 봤다. 일부의 극단적인 행동이 오히려 일본 우익에게 역공의 빌미를 줄 수 있는 데다가, 한국에 우호적인 일본 연예인들을 통해 우리의 입장을 전달할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다.
김 평론가는 또한 “일본 청년들 가운데는 아베 정부의 수출 규제에 반감을 갖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면서 ““대중문화계가 ‘무국적성’이라는 문화적 이점을 잘 활용한다면, 한국에 대한 인식을 좋게 해 미래지향적이고 평화적인 한일 관계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본다”고 전망했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