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아베 정부가 한국에 대한 보복성 수출 규제를 시작한 지 40여 일이 흘렀다. 분노와 함께 시작한 우리 국민의 일본산 불매 운동은 식을 줄을 모른다. 일상에 스민 ‘노 재팬’(No Japan) 움직임을 문화계라고 피해갈 수 있으랴. 민심을 읽은, 또는 읽지 못해 벌어진 문화계 사건들을 돌아본다.
▲ 이시언 일본여행 논란이시언은 지난달 3일 SNS에 “생일 기념 여행”이라는 글과 함께 일본에서 찍은 사진을 올렸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당시는 일본 경제산업성이 반도체 제조 과정에 필요한 3개 품목에 관해 한국으로의 수출 규제를 강화한다고 발표한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뜨거웠던 분노에 불이 붙었다. 소속사 측은 “일본에 거주하는 지인의 초대로 간 것”이라며 그의 일본 방문이 ‘자발적인’ 여행이 아님을 강조했지만, 성난 민심을 달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이시언은 문제가 된 여행 사진은 모두 삭제했다.
그룹 걸스데이 멤버 소진도 지난달 7일 일본에서 찍은 사진을 올렸다가 삭제한 바 있다. 그룹 SS501 출신 가수 김규종은 같은 달 24일 여자친구와의 일본여행 사진을 올렸다가 질타를 받았다. 그는 “일본인 여자친구와 지난 6월 일본에 다녀왔을 당시 찍은 것”이라며 사과했다. 이들을 향한 비난이 정당한가에 관한 판단과는 별개로, 해당 논란은 연예계에 일종의 경고등이 됐다. 소속 연예인에게 ‘SNS에 일본 관련 사진/글을 올리지 말라’고 권고하는 기획사도 생겨났다.
▲ “NO 수근. 찾지 않습니다. 부르지 않습니다.”
“NO 수근. 찾지 않습니다. 부르지 않습니다.” ‘강식당3’는 지난달 26일 방송에서 불매 운동 슬로건 ‘노 재팬.(NO JAPAN) 가지 않습니다. 사지 않습니다’를 패러디한 자막을 달아 호응을 얻었다. 다음날 방송한 SBS ‘정글의 법칙’에서도 “NO 손질. 하지 않습니다. 할 수 없습니다”라는 자막이 등장했다. tvN ‘놀라운 토요일’ 측은 게임 부상으로 주어지는 음식을 소개하면서, ‘바질라멘’ ‘스테이크동’ 같은 일본식 표현을 ‘바질라면’ ‘스테이크 덮밥’으로 바꿔 내보냈다.
포털사이트 반응에 민감한 TV 예능프로그램은 발 빠르게 국민 정서를 따르고 있다. 여행 예능들은 단골 촬영지였던 일본에 발길을 끊었다. 일본은 경비가 싸고 거리도 가까워 가성비 좋은 해외 촬영지로 꼽혔던 곳이다. 대신 방송사와 제작사들은 국내와 동남아로 향했다. 영화 채널들은 일본 영화 편성을 꺼리는 분위기다. 반면 EBS ‘최고의 요리비결’은 이달 초 일본식 가정식을 다룬다고 예고했다가, 시청자의 항의를 받고 주제를 ‘여름 한식 편’으로 바꿨다. 그러나 처음엔 일식 전문가로 소개됐던 요리사가 한식 전문가로 그대로 등장하면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꼴’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했다.
▲ 영화 ‘극장판 도라에몽: 진구의 달 탐사기’ 개봉 연기
일본 불매 앞에서는 노소(老小)의 구분도 없다. 여름방학 특수를 노리던 영화 ‘극장판 도라에몽: 진구의 달 탐사기’는 개봉을 무기한 연기했다. 이 영화의 원래 개봉 예정일은 오는 14일이었다. 지난달 24일 개봉한 영화 ‘명탐정 코난: 감청의 권’은 8일까지 21만7000여명의 관객을 불러모으는 데 그쳤다. 올해 초 개봉한 전작 ‘명탐정 코난: 제로의 집행인’이 국내 상영 첫 주에만 41만여 관객을 동원한 것과 비교하면 절반을 밑도는 수치다. 8일 개봉한 영화 ‘나는 예수님이 싫다’ 역시 상영관 확보에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영화인데도 관람을 독려받는 작품도 있다. 일본계 미국인 감독 미키 데자키가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주전장’이다. 일본군 위안분 문제를 다뤄, 일본에선 보수 단체들이 이 영화 상영 중지를 요청하는 기자회견도 열었다. 국내 항일 영화도 화제다.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가 일본의 사죄를 받기 위해 투쟁한 27년 여정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김복동’이 대표적이다. 지난달 16일 크라우드펀딩을 시작한 이 영화는 이틀 만에 목표금액 1000만원을 모았다. 전날 개봉한 영화 ‘봉오동전투’는 일본에 맞선 독립군의 투쟁과 숨은 이야기를 재현, 박스오피스 1위 다툼을 벌이고 있다. 오는 15일 광복절이 다가오는 만큼, 이들 영화를 향한 관심은 더욱 뜨겁게 불타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 일본인 연습생이 부른 노래, 발매 무기한 연기
일본인 연습생들이 속한 가요 기획사들은 고민이 많다. 가수 윤종신은 Mnet ‘프로듀스48’ 출신 일본인 연습생 타케우치 미유와 작업한 노래를 예정된 일정에 발표하지 않았다. “일본 아베 정부와 우익의 망언이 나오기 시작했고 사태는 급속도로 악화”돼 발매 일정을 잠정 연기했다는 설명이다. 그룹 로켓펀치 멤버 타카하시 쥬리는 최근 간담회에서 한일 갈등을 바라보는 심경이 어떠냐는 질문을 받았으나, 사회자가 답변을 막았다. 정치적 견해를 물은 것도 아닌데 지나치게 몸을 사리는 것 아닌가 싶은 한편,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국내에서 ‘퇴출 운동’의 대상이 됐던 그룹 트와이스와 아이즈원의 일부 멤버들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반응도 아니다.
한국 가수들의 일본 활동도 지금은 ‘자랑거리’가 아니다. 한 가요 기획사 관계자는 “소속 가수가 최근 일본에서 공연을 열었지만, 이를 알리는 보도자료 등을 배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국민 정서를 고려한 조처다. 다만 양국 갈등에도 일본 내 한류 인기는 식지 않고 있다. 한류의 역사가 20년 이상으로 긴 데다가, 문화 소비가 SNS와 유튜브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덕분이다. 그룹 방탄소년단이 일본에서 낸 싱글 ‘라이츠/보이 위드 러브’(Lights/Boy With Luv)는 일본에서 100만장 이상의 출하량을 기록해 ‘밀리언’ 인증을 받았다. 방탄소년단, 엑소, 트와이스 등의 대규모 일본 투어도 차질없이 진행될 예정이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