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쿡초점] 가해의 가해의 가해

[쿡초점] 가해의 가해의 가해

기사승인 2019-11-29 17:57:09

“피해자들이 느낄 고통의 정도는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하다.” 판사는 꾸짖었고 피고인들은 말이 없었다. 29일 오전 서울중앙지방법원 519호 법정. 성폭력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법위반(특수준강간)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가수 정준영과 최종훈은 이날 각각 징역 7년과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사건이 접수된 지 7개월여 만에 내려진 첫 재판이다.

정준영과 최종훈은 2016년 1월 강원도 홍천, 3월 대구 등에서 술에 취한 여성을 집단 성폭행한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 됐다. 정준영은 2015년 말 연예인들이 참여한 카카오톡 대화방에서 11차례에 걸쳐 불법 촬영물을 유포한 혐의도 받았다. 재판부는 카카오톡 대화 내용이 진정성립이 되지 않아 증거 능력이 없다며, 불법 촬영 영상 등과 관련한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 판단을 내렸다. 다만 특수준강간 혐의는 유죄로 인정해 실형을 선고했다.

앞선 10여차례의 공판에서 정준영과 최종훈은 특수준강간 혐의를 줄곧 부인해왔다. 하지만 재판부는 피해자의 진술이 일관되고 구체적이며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날 판결문에 나온 피해자 진술을 들으면서, “가해자는 가해 행위를 한 번 저지른 것이라고 주장하겠지만, 피해가 한 번으로 종결되지 않는다”던 한 여성 활동가의 말을 떠올렸다. 피해 사실을 진술하면서 피해자들은 계속되는 통증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심지어 이 ‘한 번의 가해 행위’는 또 다른 가해를 낳기까지 한다. 정준영의 불법 촬영물 유포 혐의가 세간에 알려졌을 당시, 사람들은 피해 여성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지라시’에선 여성 연예인들의 실명이 거론됐고,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엔 ‘정준영 동영상’이 올랐다. 여기에 언론도 가세했다. 채널A는 ‘단독’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피해자 한 명의 직업을 보도해 뭇매를 맞았다. 정준영 등과 함께 기소된 권모씨가 유명 연예인의 가족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건과 관계없는 권씨 가족의 이름이 기사 제목에 등장하는 일도 있었다. 

故 구하라를 폭행해 상해를 입히고, 성관계 동영상을 빌미로 그를 협박한 혐의로 징역형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최종범 사건에서도 이런 ‘가해의 가해의 가해’ 고리는 이어진다. 구하라의 피해 사실이 알려지자, ‘구하라 동영상’이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에 등장했다. 언론은 게임을 하듯 사건을 중계하고, 피해자의 사생활을 사건과 연관 지어 보도했으며, 자극적인 제목의 어뷰징 기사로 조회수를 챙겼다.

최씨 사건을 판결한 오덕식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등 사법부를 향한 성토의 목소리도 높다. 오 부장판사가 판결문에 굳이 필요 없는 성관계 장소와 횟수를 기재하고, 동영상 공개를 거부하는 피해자 측 의견에도 영상을 확인하는 등 2차 가해를 저질렀다는 주장이 나온다.

여성단체들은 정준영, 최종훈 등에 대한 선고가 내려지던 시간,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오 부장판사의 퇴진을 요구했다. 사회를 맡은 김지윤 녹색당 정책국장은 “구씨 죽음에는 부인할 수 없는 사회의 책임이 있다. 사회적 책임 중 중요한 지점 하나는 사법부에 있다”며 “성범죄 가해자에게 감정이입하는 듯한 태도와 피해자를 고려하지 않는 재판 진행과 가벼운 처벌이 피해자를 얼마나 낙담하게 했을지 상상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공지역 작가도 지난 26일 SNS에 오 부장판사를 겨냥하는 글을 남겼다. 공 작가는 “그 동영상을 왜 봤을까. 얼마나 창피한지 결정하려고? 그러고 나면 원고인 구하라는 판사 얼굴을 어떻게 보나? 판사가 신인가?”라며 분노했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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