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인형처럼’ 내 36번째 생일날 타임루프에 빠졌다 [넷플릭스 도장깨기⑭]

‘러시아 인형처럼’ 내 36번째 생일날 타임루프에 빠졌다 [넷플릭스 도장깨기⑭]

‘러시아 인형처럼’ 내 36번째 생일날 타임루프에 빠졌다

기사승인 2019-12-10 08:00:00

지난 2일 뉴욕타임스가 ‘2019년 최고의 TV쇼’ 11편을 발표했다. 최근 국내 언론에 넷플릭스 ‘킹덤’이 ‘2019년 인터내셔널 TV쇼’ TOP10에 들었다고 보도된 바로 그 리스트였다. 대부분 잘 모르는 미국드라마로 가득한 가운데 넷플릭스 ‘러시아 인형처럼’이 눈에 띄었다. 분명 올해 초 드라마의 썸네일과 예고편을 봤던 기억이 떠올랐다. 어딘가 어두운 분위기와 낯선 제목, 타임루프라는 뻔한 설정에 끌리지 않았던 그 드라마가 이렇게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니. 속아도 할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일단 1회만 보자고 다짐하며 ‘러시아 인형처럼’을 검색해 터치했다.

제목은 ‘러시아 인형처럼’이지만 인형 속에 작은 인형이 끝없이 나오는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Matryoshka) 대신 뉴욕에 살고 있는 미국인 나디아가 주인공이다. 드라마는 자신의 36번째 생일파티를 열어준 친구집 화장실 거울 앞에 서 있는 나디아(나타샤 리온)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친구들과의 시답지 않은 대화를 시작으로 낯선 남자와 하룻밤을 보내는 과정까지 직설적이고 거침없는 나디아의 캐릭터를 빠르게 요약 설명한다. 이후 잃어버린 자신의 강아지 오트밀을 거리 건너편에서 발견한 나디아는 길을 건너다 차에 치어 허무한 죽음을 맞는다. 바로 다음 장면은 드라마 맨 첫 장면으로 연결된다. 다시 친구네 화장실 거울 앞에 선 나디아는 이미 겪었던 자신의 생일날 밤이 똑같이 반복된다는 걸 발견한다. 나디아는 죽음과 회귀가 반복되는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의심되는 것들을 하나씩 확인해나가기 시작한다. 친구가 건네준 코카인 묻은 마리화나가 문제인지, 과거 유대인 학교로 쓰였다는 건물이 문제인지,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미스터리한 걸인이 문제인지.

1회만 보자는 소소한 마음으로 시작한 ‘러시아 인형처럼’을 앉은 자리에서 끝까지 정주행할 수 있었던 건 짧은 분량과 이야기의 매력 덕분이었다. ‘러시아 인형처럼’은 회당 25분 내외의 8회가 전부다. 처음부터 끝까지 달려도 3시간30분이 걸리지 않는다. 보통 드라마의 절반 수준이지만 내용이 부실한 느낌보다 속도감이 더 크게 느껴진다. 다음화 재생 버튼을 누르는 속도마저 빨라지는 느낌이다. 또 에피소드 숫자가 적어 주인공이 헤매거나 로맨스에 빠져있는 불필요한 시간도 없다. 언제든 중간에 끊을 수 있을 것 같지만, 끊을 타이밍을 잡지 못하는 마법의 시간에 갇히게 되는 이유다.

타임루프물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것 역시 장점이다. 같은 날을 반복해서 겪는 설정은 이미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았다. 배우 빌 머레이가 반복되는 하루를 이용해 피아노 고수로 거듭나는 장면으로 유명한 1993년 영화 ‘사랑의 블랙홀’이 대표적이다. 타임루프 장르는 주인공이 주어진 설정을 거부하다가 받아들이는 과정, 어느새 반복을 즐기는 과정, 결국 자기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며 루프를 탈출하는 결말까지 누구나 알 법한 클리셰가 존재한다. ‘러시아 인형처럼’은 클리셰를 적당히 비튼다. 나디아는 게임 프로그래머라는 직업을 이용해 빠르게 설정값을 파악하고 설정에서 벗어나기 위한 효율적인 방법을 동원한다. 나디아가 ‘버그’라고 이름붙인 극 중 타임루프는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조금씩 확장되고 변화한다. 문제 해결에 집중하는 기본 원칙과 변형되는 타임루프, 나디아가 내면에 깊숙이 묻어둔 과거 이야기들은 적절한 리듬감을 갖고 서로 공명한다. 적은 분량을 최대한 활용하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는 다채롭고 흥미진진하다.

반복되는 거울 이미지와 썩어가는 과일 등 눈여겨볼 힌트들이 곳곳에 숨어있다. 특히 주인공이 거울 앞에서 반복해서 깨어나는 것과 마트료시카를 뜻하는 제목의 의미를 기억하며 드라마를 보면 표면적인 것 외에 다양한 해석을 즐길 수 있다. 로맨스 영화의 전형적인 결말처럼 마무리되는 충격적인 마지막회까지 달리면, 당신도 시즌2를 기다리는 시청자 중 한 명이 된다. 다행인 건 ‘러시아 인형처럼’ 시즌2 제작이 확정됐다는 점이다.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
이준범 기자
이 기사 어떻게 생각하세요
  • 추천해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추천기사
많이 본 기사
오피니언
실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