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은 한국 연예계에 부끄러운 한 해로 기억돼야 한다. ‘글로벌 스타’로 칭송 받던 남성 가수들이 돈과 유명세를 권력 삼아 벌인 일들을 생각하면. 여성 연예인들이 여성 혐오의 토양에서 당한 일들을 생각하면 반드시 그래야 한다.
남자들의 단톡방
매일 다른 이름이 뉴스에 올랐다. 가수 정준영, 승리 등이 참여한 ‘단톡방’은 일종의 ‘데스노트’였다. 최종훈, 이종현, 용준형, 로이킴, 에디킴이 ‘단톡방’에서 불법 촬영물을 공유한 사실이 알려져 경찰서를 들락거렸다. 일각에선 이들의 혐의가 부각되자, 이른 바 ‘방학썬’ 사건을 묻기 위한 음모라고 의심했다. 가십에 호도되지 않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당시 기사 댓글들에 나온 대로, “이런 식으로 하면 털어서 안 잡혀갈 남자들 없”고 “고작 ‘몰카’도 아닌 음란물 게시”로 호들갑 떤다는 주장은 부적절하다. 방정현 변호사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사건의 핵심은 가해 남성들이 “피해 여성을 물건 다루듯 대했”던 것이다. 이것을 ‘단톡방’ 참여자 개개인의 일탈 문제로 볼 수 있을까. 슬프게도 그렇지 않다. 여성에 대한 대상화와 성적 물화는 언제든 어디에서든 벌어진다. ‘단톡방 남자들’을 처벌하는 데서 사건이 종결된다고 볼 수 없는 이유다.
남자들의 접대
양현석 YG엔터테인먼트 전 대표 프로듀서가 2014년 외국 재력가를 만난 자리에서도, 그룹 빅뱅의 전 멤버 승리가 2015년 일본인 사업가를 만난 자리에서도, Mnet ‘프로듀스’ 시리즈를 연출한 안준영 PD가 기획사 관계자들을 만난 자리에서도 ‘접대’가 벌어졌다. 양 전 대표의 성 접대 의혹(성매매 알선 혐의)는 검찰에서 불기소 처분이 내려졌다. 승리의 성매매 알선 혐의는 검찰이 수사 중이다. 안 PD와 안 PD를 접대한 연예기획사 관계자 5명은 배임증재와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위반 등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연예기획사 중 한 곳은 “술을 산 것은 맞지만, 친분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자리였다. 그 과정에서 연습생을 어떻게 해달라는 청탁과 같은 것은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친분 관계’가 누군가에게 불리한 결정을 어렵게 만든다. 불공정한 ‘카르텔’은 바로 거기에서 만들어진다.
남자들의 항소
외주 스태프 두 명을 성폭행·성추행한 혐의로 기소된 배우 강지환은 1심에서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성범죄 특성상 피해 여성들의 피해가 온전히 회복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강씨는 피해 여성들의 상처가 아물기를 생이 끝날 때까지 참회하는 게 맞다”고 꾸짖으면서도 그를 사회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강지환은, 최후변론에서 “삶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괴롭고 힘들었다”며 눈물을 흘리던 그는 1심에 불복해 항소장을 냈다. 그사이 피해 여성들은 악성댓글 등 2차 피해가 계속돼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3년 전 함께 여행을 간 여성들을 집단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을 받던 정준영과 최종훈은 1심에서 징역 6년과 징역 5년을 각각 선고받았으나, 마찬가지로 항소했다. 더불어민주당 송기헌 의원이 법원행정처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에 대한 집행유예 비율은 2014년 24.83%에서 올해 35.40%로 꾸준히 증가했다.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에 대한 집행유예도 마찬가지다. 기계적인 선처, 합의로 집행유예 선고 관행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목소리는 계속해서 커진다. 가해자 중심의 성범죄 양형기준을 재정비해달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은 지난달 20만 명 이상의 동의를 얻었다.
여자들이 당한 레이블링
올해 두 명의 젊은 여성 연예인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가수 설리와 구하라다. 생전 둘은 ‘논란’이라는 표현과 함께 자주 호명되곤 했다.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아서, 남자친구와의 데이트 사진을 SNS에 올려서, 선배 배우를 ‘~씨’라고 불러서, 예능 프로그램에서 MC에게 반발해서, 성형수술을 해서…. 일단 ‘논란’으로 불리면, 그 ‘논란’을 야기한 다른 부당함은 생각에서 지워진다. 여성의 신체를 성애화하는 시선, 사생활을 동의 없이 공개한 언론, 남성이 어린 여성에게 ‘허물없이’ 다가가려는 것은 옹호하면서 반대의 경우는 용납지 않는 풍토, 사생활 공개를 무리하게 요구하는 예능 프로그램 MC, 아름다운 외모를 강요하면서도 성형수술은 터부시하는 태도…. 보는 이들의 ‘기분권’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기본권’이 침해당하는 것을 감내해야 하고, 그룹 신화 멤버 김동완이 지적한 것처럼 “섹시하되 섹스하지 않아야 하고, 터프하되 누구와도 싸우지 않아야 하는 존재”여야 하는 것이 바로 여성 연예인, 특히 여성 아이돌이다. ‘자신다움’이 허락되지 않는 이런 부당함을, 더 이상 두고 봐선 안 된다.
여자들이 당한 폭력
EBS ‘톡!톡! 보니하니’의 MC를 맡은 그룹 버스터즈 멤버 채연은 2004년생으로 만 15세다.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개그맨 최영수와 박동근은 모두 1980년대생으로, 나이도 채연보다 많고 연예계 경력도 채연보다 훨씬 길다. 그리고 최영수는 채연을 때리는 시늉을 했다가, 박동근은 채연에게 성희롱성 발언을 했다가 프로그램에서 경질됐다. EBS가 처음 내놓은 입장은 이런 행동들이 ‘장난’이었고 출연진들은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누군가를 때리는 듯한 행위나 성적 모욕을 동반한 욕설이 장난이라는 주장은 신체조건과 물리력에서 우위를 점한 남성 입장에서나 가능한 것이고, 누군가에게 위협을 가하는 행동은 웃음거리로 소비될 수 없다. ‘허물없는 사이’라는 설명 또한 나이와 경력이 많은 남성 입장에서의 생각이다. 최영수는 사건 이후 인터뷰에서 “(채연이) 자기 때문에 저 잘리는 거냐고 하루종일 울었다”고 했다. 이것이 이 사건의 세 번째 불의다. 최영수와 박동근, 프로그램 제작 책임자가 해임된 것은 그들의 잘못을 바로잡는 것일 뿐 채연의 탓이 될 수 없다. 이 사건이 발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MBC ‘아이돌 육상 선수권 대회’ 촬영에서 남성 스태프가 그룹 이달의 소녀 멤버 츄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일이 벌어졌다. MBC는 이를 “무례”라고 표현하며 재발 방지를 위해 조심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동의 없이 다른 사람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것은 분명 폭력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잘못을 인지조차 못 한 제작진이라면, 그들의 재발 방지 약속을 믿을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여성 연예인들은 여전히 보호의 사각지대에 있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