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클라쓰’ 누구를 위한 판타지인가 [TV봤더니]

‘이태원 클라쓰’ 누구를 위한 판타지인가 [TV봤더니]

‘이태원 클라쓰’, 납작해진 여성의 욕망

기사승인 2020-02-28 08:00:00

[쿠키뉴스] 이은호 기자 =재벌가 아들이 낸 무면허 교통사고에 아버지를 잃었다. 그런데 사고를 낸 놈은 온데간데없고 돈 없고 ‘빽’ 없는 사람이 가해자로 잡혀 왔다. 어설픈 복수는 처절한 응징으로 돌아왔다. 가해자는 가업을 이으며 승승장구하는데, 아버지를 잃은 남자는 전과자 신세다. 남자는 다짐한다. ‘더욱 강해져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말리라!’ 

피도 눈물도 없는 악인에게 희생된 온화하고 정의로운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의 정신을 물려받은 아들의 이야기. JTBC 금토드라마 ‘이태원 클라쓰’의 설정은 무협 소설에서 흔히 되풀이돼 온 ‘자복부구’ 신화의 전형이다. 이 안에서 부자(父子)들은 저마다의 소신과 신념을 세습하며 ‘남성들만의 패밀리쉽’을 공고히 한다. 이 세계에 여성이 끼어들 자리는, 당연하게도 거의 없다. 

‘이태원 클라쓰’의 박새로이(박서준)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게 만들고 자신의 인생마저 망가뜨린 장가에 복수하려 한다. 첫사랑 오수아(권나라)가 좋아하던 이태원에 술집 ‘단밤’을 내 장가의 가게에 맞선다. 하지만 7년간의 와신상담이 무색할 만큼 사장으로서 그는 직무유기이거나 최소 무능이다. 그는 단밤의 음식 맛이 떨어진다는 것도, 서빙 직원이 엄지손가락을 음식에 담근 채로 내간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런 단밤을 구원하는 건 조이서(김다미)다. 그는 두뇌 회전이 빠르고 온라인에서 영향력도 높다. 조이서는 우연히 만난 박새로이의 정의로움에 끌려 단밤에 입성하게 되고, 파리만 날리던 단밤을 인기 주점으로 탈바꿈시킨다. 

그러나 이렇게 출중한 능력을 지닌 조이서도 곧은 신념을 가진 박새로이 앞에선 끊임없이 미성숙한 존재가 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의를 최대 덕목으로 삼는 박새로이에게 조이서의 실리주의는 꾸짖어 교정해 마땅한 잘못이다. 이 과정에서 박새로이의 무능함은 희미해지고 그의 영웅적인 면모만 부각된다. 그리고 조이서는 “(박새로이를) 그저 그런 사람이 아닌, 대단한 남자로 만들 거”라며 기꺼이 힘을 보탠다. 연애 감정을 미끼로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의 세계로 편입되길 원하는 ‘이태원 클라쓰’의 전개는, 새롭지도 흥미롭지도 않다. 

여자 주인공이 일종의 존경심을 갖고 남자 주인공을 따르는데 반해, 여자 주인공들 사이에 존재하는 건 적대감뿐이다. 오수아는 장가의 지원을 받아 명문대학교에 진학하고 졸업 후엔 장가의 핵심 인재로 성장한다. 박새로이를 향한 연정 때문에 마음이 괴로운 그에게, 조이서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다. 조이서도 박새로이의 첫사랑인 오수아가 꼴 보기 싫다. 오수아는 박새로이를 좋아한다는 조이서에게 “새로이는 날 좋아해”라고 공격하고, 조이서는 “그럼 어쩔 수 없네. 언니, 망가져야겠다”고 맞선다. 이에 대한 오수아의 반격은 이렇다. “(엷은 미소와 함께) 애써봐. 상큼아.” 두 여자가 한 남자를 두고 싸운다는 설정만으로도 충분히 고루한데, 신이시여, 이게 정녕 2000년대 ‘인소’ 대사가 아니란 말입니까. 

능력 있는 여성이 남성의 뚝심에 반해 그를 믿고 헌신한다. 대의를 품은 남성에 비해 여성의 욕망은 ‘남성의 마음을 얻는 것’으로 축소된다. 물론 박새로이가 마냥 무능력한 것만은 아니다. ‘내 사람들’을 향한 그의 신의는 단밤 직원들의 마음을 감화시킨다. 학창시절 박새로이의 도움을 받았던 왕따 피해자 이호진(이다윗)은 유능한 펀드 매니저가 돼 박새로이에게 힘을 보탠다. 하지만 박새로이가 ‘성공한 사장’이 되기 위해선 많은 이들의 선의와 우연이 전제돼야 한다. 요컨대 박새로이를 멋진 인물로 그려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이태원 클라쓰’는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이것이 누구를 위한 판타지인지는 너무나 명백하다. 

한 가지 더. ‘이태원 클라쓰’의 여성주의적 성찰의 부족은 사소한 장면에서도 드러난다. 지난 5회의 장면이 대표적이다. 클럽에서 이성과의 즉석만남을 꿈꾸는 최승권(류경수)에게, 조이서는 상대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라고 조언한다. 상대가 싫어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최승권의 질문에 조이서는 “예쁘게 치장하고 왔어. 마음에 드는 놈이든 안 드는 놈이든, 대시 받으면 자존감 상승하는 거”라고 답한다. 틀렸다. 여성의 꾸밈은 이성에게 호감을 얻기 위함이 아니며, 여성의 자존감은 남성의 대시로 채워지지 않는다. 여성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주지 않는다면, ‘이태원 클라쓰’가 남성의 판타지에 복무한다는 의혹은 쉽게 떨쳐지지 않을 것이다.

wild37@kukinews.com / 사진=JTBC 제공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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