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이은호 기자 =SBS가 모바일 메신저 텔레그램을 통해 성 착취 사진·영상을 제작·유포한 혐의로 구속 송치된 조주빈의 신상을 지난달 23일 공개한 뒤, 2차 피해를 유발하거나 사건의 본질과 무관한 언론 보도가 연일 쏟아져 나왔다. 언론노조 성평등위원회와 민주언론실천위원회는 다음날 긴급지침을 발표해 ‘피해자를 보호하고 가해자의 책임을 약화시키지 않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으나,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지난 일주일간 방송된 지상파 및 종편의 탐사 보도 프로그램들은 이번 ‘텔레그램 n번방/박사방’ 사건을 어떻게 다뤘을까.
■ 피해 재연이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는가
지난달 28일 방송한 ‘그알’ 31일 방송한 MBC ‘PD수첩’, 이달 2일 방송한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이하 스포트라이트) 모두 조주빈 등 가해자들에게 호소하는 피해자의 음성을 재연해 내보냈다. ‘그알’은 ‘살려달라’ ‘한 번만 봐 달라’ ‘죄송하다’ ‘억울하다’ 등의 음성을 반복해 들려주거나, 성 착취 피해 내용이 담긴 음성을 재연하기도 했다. ‘PD수첩’ 역시 피해자가 조주빈에게 ‘죄송하다’ ‘한 번만 봐달라’고 호소하는 음성을 한 차례 내보냈다. ‘스포트라이트’의 경우 조주빈 체포 전인 지난달 20일 방송에서 ‘박사’의 협박과 요구에 응하며 괴로워하거나 도움을 호소하는 피해자의 모습, 옷을 벗는 여성의 실루엣을 재연하고, 심지어 ‘박사방’ 회원이 피해자를 성폭행하고 이를 촬영하는 상황까지 가해자 시선으로 재구성하는 등 가장 자극적인 보도 행태를 보였다.
■ 가해자를 예외적인 존재로 인식하게 했는가
언론 노조는 이번 긴급 지침에서 성범죄자가 비정상적 특정인으로 보이도록 보도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악마’ ‘짐승’ ‘늑대’ 등의 표현이 가해 행위를 축소하거나, 가해자를 비정상적인 존재로 타자화해 예외적 사건으로 인식하게 한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그알’은 방송 내내 조주빈을 “괴물”로 호명했다. 이는 ‘박사’를 비롯한 텔레그램 n번방 회원으로 하여금 운영자를 추종하게 만드는 표현일뿐 아니라, 언론 노조의 설명대로 성범죄자가 비정상적인 특정인으로 보이도록 만든다. 이로 인해 이번 사건의 토양이 된 우리 사회의 강간 문화와 여성 혐오는 희석된다. ‘그알’은 또한 “좁게는 조주빈에게 피해자의 신원정보를 구해다 준 조력자들부터 넓게는 박사방에서 피해자들의 사진과 영상을 소비해온 관전자들까지”를 ‘팀 박사’라고 명명했다. 하지만 ‘팀 박사’는 조력자·관전자들의 가해 행위를 축소한다는 점에서 부적절한 호칭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실제로 여성단체와 법조계에선 조력자는 물론이고, 박사방에 돈을 내고 가입한 관전자들도 공범 수준으로 처벌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스포트라이트’는 지난 2일 방송에서 조주빈의 모습을 재연하면서, 테이블에 올려진 영화 ‘직쏘’의 연쇄 살인마 직쏘의 가면을 계속해서 노출시켰다. 이는 직접적인 ‘악마’ 호명이 아니더라도 타자화된 악마의 이미지를 조주빈에게 덧씌울 수 있다는 점에서 부적절했다.
■ 가해자의 서사를 소비하는가
‘그알’은 조주빈이 진짜 박사가 아닐 수 있다는 의혹을 던진 뒤, 박사와 조주빈의 행적을 비교하며 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구성을 취했다. 이 과정에서 제작진은 박사가 쓴 자서전 형식의 글을 통해 그의 심리를 분석하는 한편, 조주빈이 어린 시절 경제적으로 궁핍했으며 아버지의 폭력과 부모의 이혼 등을 겪었다는 조주빈 친구의 인터뷰를 공개했다. 제작진은 “가정환경 역시 분석을 위해서는 체크를 해봐야 할 중요한 부분”이라는 당위를 내세웠지만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진 못했다. 오히려 “쉽사리 벗어날 수 없었던 가난과 이혼한 어머니에 대한 미움이 씨앗이 돼 텔레그램 속 박사란 괴물로 자라난 것일까?”라고 묻는 등 가해자에게 서사를 부여하는 듯한 진행으로 거센 반발을 샀다. ‘조주빈이 관상과 관련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활동했다’ ‘전역 이후 키 크는 수술을 받았다’와 같이 사적인 이야기로 사건의 본질을 흐린다는 인상도 짙다. 박사와 조주빈의 공통점을 찾는다는 명분 아래, ‘그알’은 듣지 않아도 될 조주빈의 말에 일일이 귀 기울이며 그를 향한 마이크의 볼륨을 높였다. 하지만 이런 가해자 중심의 서사는, 가해자에게 그가 가장 갈구할 대중적 관심만 안겨줄 뿐 아무 것도 해결해주지 못한다. 뉴질랜드에서 총기 난사로 50명이 희생됐을 당시, 저신다 아던 총리는 테러범의 이름조차 부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가 원하는 악명을 결코 허락하지 않겠다는 의도였다. 밴드 자우림의 보컬 김윤아 등 여성들도 SNS를 통해 “범죄자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마십시오. 범죄자에게 마이크를 쥐여주지 마십시오”라고 외치고 있다.
■ 디지털 성범죄의 구조적 해결을 위한 문제 제기가 이뤄졌는가
‘PD수첩’은 방송 말미 10여분을 할애해 우리 사회가 디지털 성범죄를 시정하기 위한 몇 번의 골든타임을 놓쳤음을 지적하고, 디지털 성범죄를 경시하는 사법부의 인식 개선을 촉구했다. 유승진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사무과장은 2017년 소라넷, 2018년 웹하드 카르텔, 2019년 버닝썬 게이트를 짚으면서 “온라인 공간에서 여성을 향해서 이뤄지는 집단적인 혐오 범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처벌해야 하는 주체가, 이 문제를 굉장히 경시해왔다는 것 때문에 지금의 텔레그램 성범죄가 있을 수 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스포트라이트’ 역시 법무부 양성평등정책 특별자문관인 서지현 검사를 인터뷰해 “(텔레그램을 통한 성착취물 제작·유포는) 당연히 예견된 사건”이라는 워딩을 얻어냈다. 서 검사는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은 국회·경찰·검찰·법원 “모두의 문제”라고 했다. 또한 자신이 소속한 법무부의 디지털 성범죄 태스크포스는 “미비한 법률을 정비해서 발전하는 과학기술과 디지털 범죄에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갈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마련 중”이라며 “지금이 끊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한다. 더 많이, 끝까지, 디지털 성범죄가 사라질 때까지 함께 분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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