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의사생활’ TV를 끄면 사라지는 힐링 [TV봤더니]

‘슬기로운 의사생활’ TV를 끄면 사라지는 힐링 [TV봤더니]

‘슬기로운 의사생활’ TV를 끄면 사라지는 힐링

기사승인 2020-04-16 07:00:00

“인터넷에서 찾아봤더니…”라는 말을 듣자마자, 진료를 보던 의사는 한숨부터 푹 쉬었다. 손가락뼈가 튀어나온 엄마를 모시고 정형외과에 갔을 때 일이다. 엄마는 그 병원에서 보험 적용이 안 되는 비싼 치료를 받았다. 뚜렷한 차도는 보이지 않았다. 과거 살을 빼겠다며 찾아간 한 의원에선 내게 지방 분해를 도와준다는 시술을 추천하면서 ‘호르몬에 변화가 생겨 부정출혈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 적도 있다. 당시 이 병원을 찾은 환자 대부분은 정상 체중인 여성들이었다. ‘지방 분해 시술이 아니라 내 몸 긍정하기 프로그램 같은 걸 권해야 하는 거 아니야?’ 병원을 나서며 생각했다.

살면서 내과, 치과, 산부인과, 응급실 등 온갖 병원을 가봤지만, 마음이 편했던 기억은 많지 않다. tvN 목요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볼 때마다 이질감이 느껴지는 건 이 때문이다. 율제병원 의사 중엔 천재 아닌 이가 없고 환자를 사랑하지 않는 이도 없다. 응급 환자가 실려 오면 누구든 피곤한 내색도 없이 콜에 응하고, 경제적으로 궁핍한 환자들에겐 월급을 털어서라도 수술을 해주는 의사도 있다. 이 세계엔 신규 간호사를 사지로 내모는 ‘태움’도 없고, 의료 사고도 없으며, 의료 사고를 은폐하려는 의사는 더더욱 없다. 현실 속 의사들이 무능력하거나 부도덕하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실재하는 대형 병원의 구조적 문제를 외면하거나 개인의 문제로 치환해 휴머니즘은 완성하는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눈속임을 말하려는 것이다.

이익준(조정석)은 서울대 의예과를 수석 입학·수석 졸업했고 동기 중에도 가장 먼저 승진한 실력파 외과 의사다. 게다가 장기기증 뇌사자를 어린이날 죽게 할 수 없다며 적출 수술을 미루고, “얌전히 내 수술만” 하는 게 아니라 “이 방, 저 방 다 들여다보는 게 루틴”일 만큼 환자들을 세심하게 돌본다. 익명의 후원자가 돼 경제적으로 궁핍한 환자를 돕는 안정원(유연석), 무뇌증 아기를 출산하는 산모의 트라우마를 염려해 태어나는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하게 한 양석형(김대명) 등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주인공 5인방은 모두 유능하고 선량하다. 이 세계의 의사들은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지 않거나, 과중한 업무량을 개인의 능력이나 소명의식으로 극복한다. 

현실은 다르다. 주인공 5인방과 같은 상급종합병원 외과계 봉직의들은 일주일에 71시간에 달하는 정규 근무에 임하고 있다. 여기에 초과 근무와 온콜 당직 및 야간 당직 등을 고려하면, 봉직의들이 과도한 업무량을 소화하고 있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전공의나 간호사들의 근무 환경은 훨씬 가혹하다. 살인적인 업무량은 ‘태움’으로 대표되는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이어진다. 구조적 문제를 뛰어넘어 익준 등 율제병원 의사들처럼 환자와 교감하려면, 엄청난 개인의 ‘노오력’이 필요하다. 이런 ‘노오력’이 강요된 결과는 어떤가. 지난해 2월, 과로에 시달리던 30대 전문의가 병원 당직실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그는 사망 직전 일주일 간 113시간 일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간호사의 연평균 근무시간은 지난해 기준 2436시간으로 근로기준법상 연간 최대 근무 시간을 훨씬 웃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에도 전공의가 과로에 시달리는 사례는 나온다. 3회에서 흉부외과 전공의 도재학(정문성)이 수술 도중 선 채로 잠이 들었다가 집도의 김준완(정경호)에게 핀잔을 듣는 장면이다. 현실에서 벌어졌다면 의료 사고로도 이어질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다. 그리고 이것은 무능력한 개인 때문이 아니라, 대부분 고강도 업무와 부족한 수면 시간으로 고통받는 전공의들의 열악한 근무 환경으로 인한 것이다. 드라마가 수술장에서 조는 전공의를 어리숙한 캐릭터로 묘사해 웃음을 안기는 동안, 현실에선 전공의들이 충분한 휴식을 보장받지 못해 업무 수행에 불안감을 느끼고 심지어 자신의 생명을 위협받기까지 한다.

‘슬기로운 의사생활’ 속 율제병원은 개인의 선의만 있다면 어떤 문제든 해결할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현실에선 개인의 선의가 시스템의 결함으로 좌절되기도 한다. 누군가는 판타지에 가까운 율제병원에서 위안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다는 이유로, ‘슬기로운 의사생활’이 주는 가상의 힐링은 TV를 끄는 순간 사라진다. 극적인 갈등 없이 일견 ‘순한 맛’을 표방하는 듯한 드라마지만, 80여분의 러닝타임이 지나면 인공 조미료 같은 맛만 입가에 남는다.

wild37@kukinews.com / 사진=tvN 제공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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