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대 총선 개표 방송의 다섯 가지 순간들

21대 총선 개표 방송의 다섯 가지 순간들

21대 총선 개표 방송의 다섯 가지 순간들

기사승인 2020-04-17 08:00:00

[쿠키뉴스] 이은호 기자 =제21대 국회의원 선거가 15일 끝났다. ‘이 후보냐 저 후보냐’, ‘이 정당이냐 저 정당이냐’를 고민하던 유권자들은 선거 개표 방송을 앞두고도 ‘이 채널이냐 저 채널이냐’를 두고 내적 갈등에 시달렸다. 각 방송사가 오랜 시간 준비한 개표 방송이 어떤 의미 있는 순간들을 남겼는지 돌아봤다.

SBS와 MBC의 ‘합법적 명예훼손’

무릇 한국의 선거 방송은 예상치 못한 패러디와 뛰어난 컴퓨터 그래픽(CG) 기술로 완성된다. 정치적 엄숙주의를 깨드린 방송사들의 기발한 합성 이미지 덕택에 온라인에선 ‘합법적 명예훼손’이라는 신조어도 생겨났다. 이번 선거의 ‘합법적 명예훼손’은 SBS와 MBC의 이파전이었다. MBC는 후보자들이 BTS·모모랜드·싸이 등 K팝에 맞춰 춤을 추게 했고, 각 지역구 투표율을 해당 지역의 특산물에 빗대 표현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아찔했던 순간은 SBS가 후보자들을 유명 가수에 패러디했던 때였다. 가령 SBS는 대표적인 친박계 인사인 조원진 대구 달서병 후보를 가수 스티비 원더와 합성해 배경음악으로 ‘이즌 쉬 러블리’(Isn’t she lovely)를 내보냈다. 화룡점정은 “그녀(박근혜 전 대통령으로 추정)를 향한 사랑은 이뤄질까요?”라는 아나운서의 내레이션. 이 외에 청와대 출신인 고민정 광진을 후보는 ‘달빛 아래 노래를 부르는 셀린 디온’이 됐고, 윤건영 서울 구로을 후보는 ‘문워크 춤을 추는 마이클 잭슨’이 됐다. 문재인 대통령의 성씨 ‘문’(Moon)에 착안한 패러디다.

바지 정장 입은 여성 앵커들

KBS의 정세진·이소정·김솔희 앵커, MBC의 박혜진·이재은·강다솜 앵커 등 양사의 여성 아나운서들 모두 바지 정장을 입은 채 개표 방송을 진행해 눈길을 끌었다. 통상 개표 방송은 10시간 이상 생방송으로 이어지는 데다가 앵커들은 서 있거나 걸어 다니면서 지역구별 투표율 등을 소개해야 한다. 때문에 시청자들 사이에선 ‘움직임에 제약이 있는 치마 정장보다 활동성이 뛰어난 바지 정장을 입은 모습이 더욱 전문적으로 보인다’는 의견이 나왔다. 물론 이것이 ‘바지는 옳고 치마는 틀리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다만, 여성 앵커들이 치마만 입을 수 있는 것과 치마와 바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는 건 분명 다르다. 세상은 이렇게 조금씩 바뀌어 간다.

세월호 추모한 MBC

종이배를 탄 아이가 토끼 인형과 함께 바다를 항해한다. 바다는 성난 파도로 일렁인다. 앞길을 비춰야 할 등대는 두 개로 갈라지고 바닷속에서 거대한 빌딩들이 솟아오른다. 거세어진 파도는 급기야 소녀의 토끼 인형을 집어삼킨다. 소녀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바다로 뛰어들어 토끼 인형을 구한다. 노란색 비눗방울이 토끼 인형을 감싸고 거대한 고래가 소녀와 토끼 인형을 등에 업고 하늘로 날아오른다. MBC가 출구조사 오프닝에 내보낸 이 영상은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는 듯한 연출로 호평받았다. 이뿐 아니라 소녀의 종이배 옆으로 지나간 거대한 선박에는 촛불 혁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방역, ‘노 재팬’(No Japan) 운동 등 우리 현대사의 의미 있는 순간들이 고스란히 새겨져 의미를 더했다.

관습적인 여성혐오

MBC는 서울 동작을에 출마한 이수진 후보와 나경원 후보의 경합을 소개하며 “여성 법관 출신 닮은꼴 매치”라며 “언니 저 맘에 안 들죠”라는 표현을 써 질타받았다. ‘언니 저 마음에 안 들죠’는 2015년 한 예능 프로그램 촬영 중 두 여성 연예인이 개인적으로 나눈 대화로, 당사자들의 동의 없이 유출돼 논란을 빚었다. 이 같은 MBC의 소개는 두 후보의 선거 과정을 여성이 벌이는 개인적 갈등이나 신경전으로 묘사했다는 점에서 여성 혐오적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시청자의 항의가 쇄도하자 성장경 앵커는 방송 중에 “의도는 아니었지만 세심하게 살피지 못해 오해를 불러일으킨 점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빠른 피드백은 바람직하지만, 과연 이 사과에 ‘의도는 아니었지만’이나 ‘오해’ 같은 표현이 들어갈 필요가 있었을까? 한편 SBS는 후보자들의 유년 시절 사진을 보여주는 ‘청춘사진관’ 코너에서 나 후보를 소개하며 “아역 배우도 울고 갈 미모의 꼬마 숙녀”로 표현했다. 다른 남성 후보자들의 어린 시절 모습이 ‘모범생’이나 ‘반장’ 등 성과를 나타내는 단어로 묘사된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CG 이긴 수작업

16일 시청률 조사회사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지상파 3사의 개표 방송 중 KBS1 ‘내 삶을 바꾸는 선택 2020’이 유일하게 두 자릿수 시청률을 기록하며 시청률 경쟁에서 승리했다. 반면 온라인에서는 김어준이 진행한 TBS의 ‘김어준의 개표공장’과 ‘TBS 개표 댓글공장’이 누적 조회 수 237만 건, 최대 동시 접속자 수는 15만 8417명을 기록하며 승기를 꽂았다. 지상파의 화려한 CG에 맞서 괘도와 화이트보드 상황판 등 수작업을 바탕으로 한 B급 감성의 개표 중계가 웃음을 안겼다. 박시영 윈지코리아컨설팅 대표와 전화연결을 한 유튜브 채널 ‘김용민TV’의 생중계도 100만 건의 누적 조회수를 자랑하며 온라인 개표 방송의 강자로 떠올랐다. 박 대표는 여론조사 데이터를 바탕으로 투표 결과를 예측하는 유튜브 방송 ‘박시영의 눈’을 통해 누리꾼들에게 눈도장을 찍은 바 있다.

wild37@kukinews.com / 사진=KBS, MBC, SBS, TBS 유튜브 개표 방송 캡처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이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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