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화의 티타임에 초대] 성묘

[이정화의 티타임에 초대] 성묘

기사승인 2020-04-23 10:56:13

성묘를 했다. 한 번도 뵙지 못한 시아버님 앞에 서는 느낌은 매해 다르다. 갓 시집와선 시어머님이 하라는 대로만 하느라 아무 생각도 없었다. 내가 성묘 준비를 맡고 나선 가족들 음식에만 신경이 쓰여 숙제하듯 있었다. 이제는 무덤 앞에서도 함께한 세월만큼 마음이 쌓인다.

남편과 결혼을 결심했을 때, 나는 너무 어렸다. 결혼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그럼에도 소망이 있었는데 서른다섯, 젊은 나이에 홀로되신 시어머님께 정말 잘하는 며느리가 되는 것이었다. 모두 들 걱정한 홀어머니 외아들 시집살이에, 아마도 허세를 부렸던 듯하다.

친정어머니는 철없이 큰소리치는 내게 당부하셨다. "한결같이 하겠다고만 마음먹어라. 너무 잘 하려다 보면 부담스럽고 더 힘들테니…. 밥도 은근한 불에서 해야지, 활활 타는 불에서 하는 게 아니란다." 

그러나 결혼 후, 나는 시댁과 마주 보는 아파트에 살며 시어머님께 매일 문안 전화를 드렸다. 수시로 시댁에 들러 어머님 뜻을 살폈고 나름 최선을 다했다. 사실 이건 전적으로 내 입장일 뿐, 고깃국을 퍼도 내 그릇엔 고기 한 점을 더 얹어주실 만큼 나를 위해주셨던 시어머님으로선 어머님이 해주시는 것보다 나는 한없이 부족했을 것이다.

하루는 어머님이 말씀도 없이 집을 비우셨다. 같이 점심을 드시기로 했던 어머님은 연락도 안 되는데 나만 집에 편히 있을 순 없어, 나는 종일 시댁 입구의 돌계단에 앉아 어머님을 기다렸다. 막막한 오후가 지나고 저녁 바람 속에 별이 반짝이기 시작했을 때, 그제야 돌아오신 어머님은 아버님 산소에 다녀왔다고 하셨다. 어머님은 내게 뭔가를 오해하셔서 화가 나 계셨다. 

그게 거기까지 갈 일이셨나, 무덤에다 내 흉이라도 보신 건가. 영문도 모른 채 어머님을 걱정하던 내 마음은 어느새 섭섭함으로 변하였다. 그 뒤론 산소에 갈 때마다 그날이 떠올랐다. 새록새록 어머님께 화가 나기도 했다. 

나이가 들어선 지 요즘은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그 옛날의 기억을 떠올려도 마음만 시리다. 그날 시어머님께서 가실 수 있던 곳이 고작 무덤뿐이었다는 것도, 그걸 알면서도 그 곳으로 달려갔을 어머님의 그때의 젊음과 서러운 세월이 정말로 가슴 아프다. 

또 나도 아들을 가진 엄마라 시아버님의 부모님을 생각하게 된다. 6.25 전쟁 중, 잠시 월남해 몸을 피했다가 곧 돌아올 줄 알았던 외아들과 남북으로 생이별한 부모, 눈물로 아들만 기다렸을 그 어머니 아버지는 대체 그 뒤에 어떻게 사시다 또 어떻게 돌아가셨을지…. 같은 엄마의 마음으로 그 비통함을 그려보면 시아버님의 무덤은 마냥 쓸어주고픈 아들의 자리가 된다. 

성묘는 오랫동안 나에겐 그저 번거롭고 무의미한 행사 치레였다. 시가 쪽 성묘라서만은 아니었다. 누구든, 우리가 무덤이나 납골당에 간다고 죽은 사람이 뭘 알겠나 싶고, 죽어도 못 잊을 사람이라면 굳이 그 곳에 안가도 이미 우리 마음 속에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점점 성묘는 살아남은 사람을 위한 특별한 시간이라고 느껴진다. 나는 그 자리에서 비로소, 사진으로만 뵌 시아버님과 인연으로 이어진다. 시어머님이, 어렵기만 한 시어른이 아닌 가여운 아내이며, 나처럼 자식만 바라본 엄마라는 걸 깨닫는다. 또 나는 그 자리에서, 네 살에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는 남편이 내 아버지를 나보다 더 좋아했던 마음과 그의 어린 시절을 짐작해본다. 

나는 죽은 사람들의 자리에서 결국 살아있는 우리들의 삶을 생각한다. 그것은 나를 세월 앞에서 좀 더 순하게 만들고, 살아가야 할 날들과 먼 훗날도 소중히 그려보게 만든다. 나는 오늘도 기도한다. 돌아가신 분들의 그곳이 어디든, 풀처럼 흙처럼 머문 그 자리에서 모두 평안하시길…. 어머님께서 이곳에 오실 때면 바람으로라도 위로해주시길…. 햇빛으로라도 남은 가족을 쓸어주시길…. 아무도 말이 없지만 모두의 마음은 전해온다. 사월의 꽃향기 속에서. 

이정화(주부/작가)

최문갑 기자
mgc1@kukinews.com
최문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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