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강한결 기자 = “전사가 ‘오크’에게 일격을 당했습니다. 사제는 치유마법을 사용합니다. 주사위를 굴려보니 6이 나왔습니다. 전사의 체력이 모두 회복됐습니다.”
TRPG(테이블탑 역할수행게임)를 해본 분들이라면 익숙하게 느끼실 문장입니다. TRPG는 오프라인에서 사람들이 테이블에 모여 앉아서, 대화를 통해 진행하고 각자가 분담된 역할을 연기하는(Role playing) 게임을 말합니다. 컴퓨터 RPG의 선조 격인 TRPG는 현대적인 의미의 게임보다는 놀이에 가까운 느낌도 있죠.
TRPG는 대화를 통해 캐릭터의 행동을 정하고 이야기를 진행합니다. 이 과정에서 플레이어의 공격력이나 행동에 대한 성공을 판정하는 데 주사위가 사용됩니다. 마스터의 사회로 진행되고 모든 것을 주사위로 해결하는 TRPG는 자유도가 매우 높은 편이죠. 멋진 그래픽은 없지만 상상력을 통해 원하는 것을 구현할 수 있습니다. 각종 규칙이나 시스템을 모아놓은 룰(rule)북이 있지만, 플레이어의 재량에 따라 언제든 변경이 가능하죠.
장르의 제약도 사실상 없습니다. 이후 설명하겠지만 ‘던전 앤 드래곤(D&D)’과 같은 작품을 좋아한다면, 모험가 파티를 꾸리고 괴물을 무찌르는 서양 중세풍 판타지 장르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미국의 소설가 러프크래프트의 작품 속에 자주 등장하는 ‘크툴루 신화’를 도입한다면 코스믹 호러(우주적 공포라고 불리는 범접 못 할 대상) TRPG가 될 수 있죠.
사이버펑크, 슈퍼히어로, 아포칼립스 세계관까지 어떠한 장르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기자는 초등학생 시절 동생, 친구와 함께 포켓몬스터 TRPG를 하기도 했습니다. 좋아하는 포켓몬 6마리를 A4용지에 써놓고 배틀을 했는데요. 당시에는 단순히 ‘피했다’, ‘맞았다’로 억지를 부리면서도 즐겁게 놀던 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그때는 TRPG라는 게 무엇인지도 제대로 몰랐지만 말이죠.
하지만 생각보다 TRPG를 아직 제대로 해보지 못한 분들도 많을 것이라 생각이 드는데요. 단순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습니다. 먼저 함께할 사람을 구하기가 힘들다는 것이 가장 핵심 원인이죠. 원활한 게임 진행을 위해서는 통상적으로 마스터 1명, 플레이어 3~4명이 필요합니다. TRPG에 재미를 붙인다 해도 함께 즐길 사람을 찾는다는 것이 가장 큰 난제죠.
여기에 규칙을 숙지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어느 정도 룰이 갖춰지지 않으면 게임의 진행은 산으로 가기 마련입니다. 또한 플레이어들이 ‘과몰입’해서 진지하게 TRPG를 즐기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 함께하는 동료 가운데 한 명이라도 어색해한다면, 자연스레 게임은 중단될 수 밖에 없습니다.
준비과정이 매우 번거로운 TRPG는 놀랍게도 현재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이제는 하나의 장르로 굳어지기도 했죠. 컴퓨터, 플레이스테이션·엑스박스·닌텐도 스위치와 같은 콘솔 등 홀로 게임을 즐길 수 있는 다양한 플랫폼이 있는데 왜 아직까지 TRPG의 인기가 이어지는 걸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TRPG만의 대체할 수 없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죠. TRPG는 상상력에 기반한 장르이기에 자유도도 매우 높고, 함께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에 소통에서 오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참가자가 직접 이야기를 만든 이야기를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강점이라 볼 수 있죠.
이 매력에 매료된 게이머는 디지털로 TRPG을 즐기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고 후에는 컴퓨터 혹은 콘솔로 즐기는 TRPG도 생겨났죠. 지금은 많이 쓰이지는 않지만 초창기에는 ORPG(온라인 역할수행게임)라는 용어도 종종 쓰였습니다.
디지털을 통해 TRPG을 즐기는 것에는 몇가지 장점이 있는데요. 그중 가장 큰 강점은 함께할 동료를 모으기 쉽다는 점입니다. 기자에게는 PC통신 시절부터 TRPG 동호회 활동을 활발히 해온 지인이 있는데요. 그는 지금도 당시에 만난 동료들과 종종 만나 ORPG를 즐기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TRPG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에 대해서도 알아봐야겠죠. 1970년 제작된 D&D는 판타지 세계관에 규칙을 도입하여 게임화한 최초의 RPG입니다. RPG라는 개념의 시초, 지구상 모든 RPG의 뿌리라 할 수 있죠. 마법사, 전사, 도적, 사제, 궁수 등으로 이루어진 모험가가 괴물을 무찌르고 보물을 얻는다는 판타지의 클리셰도 이 작품에서 만들어졌습니다. D&D는 현재까지도 많은 전세계 다양한 유저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D&D는 향후 컴퓨터나 콘솔에서 출시된 RPG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요. D&D 세계관 중 하나인 ‘포가든 렐름’ 세계관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바이오웨어의 ‘발더스 게이트’ 시리즈, 마찬가지로 작중에 등장하는 세계관인 ‘미스타라’를 바탕으로 제작된 캡콤의 아케이드판 ‘던전앤드래곤’ 등 다양한 작품이 출시되기도 했습니다.
이중 1996년 출시된 캡콤의 ‘던전앤드래곤’은 한국에서 많은 사랑을 받은 게임입니다. 1990년대 후반 혹은 2000년대 초반 오락실을 자주 갔던 ‘밀레니얼 세대(1980~1990년대 중반 출생자)’에게는 매우 친숙한 게임이기도 하죠.
최대 4인까지 함께 플레이하는 것이 가능했던 던전앤드래곤은 우정 파괴 게임으로도 유명했습니다. 기자 역시 초등학생 시절 친구들과 함께 오락실에서 이 게임을 자주했는데 주로 클레릭(사제)를 했죠, 사제는 동료들의 체력이 낮아지면 빠르게 치유마법을 사용해야 하는데요. 상대적으로 다른 직업보다는 재미가 떨어지는 편이죠. 당시 기자는 상대방을 살려주는 것에 쾌감을 느끼는 천상 ‘서포터’였기에 흔쾌히 클레릭을 골랐죠.
여느 때와 같이 게임을 하던 중 친구 한 명이 기자에게 핀잔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치유마법이 늦어 자신이 죽었다고 말이죠. 기분이 상한 기자는 친구와 다투고 일주일동안 냉랭한 관계가 이어졌습니다. 나중에는 그 친구가 미안하다며 궁수 캐릭터를 양보해 화해하긴 했지만요.
최근 기자는 앞에 언급된 친구와 이야기하는 도중 자유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는데요. 자유도가 높은 오픈월드 게임을 해도 충족되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 친구의 푸념이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이전에 했던 포켓몬 TRPG를 떠올리며 둘 다 웃었습니다. 투박하기 그지없었지만, 살면서 가장 즐겁게 한 게임이기도 했으니까요.
나날이 기술이 발전하면서 실사에 가까운 그래픽의 RPG가 나오고 있지만, 여전히 TRPG를 찾는 게이머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여러 가지 생각이 듭니다. 조만간 오랜만에 친구에게 전화해 TRPG를 함께 하자고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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