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여성에게 저렴하고 안전하며 합법적인 임신중지를”

“모든 여성에게 저렴하고 안전하며 합법적인 임신중지를”

28일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지를 위한 국제행동의 날"
낙태죄 폐지 10개월… 건강보험·약물도입 논의 ‘깜깜’ 

기사승인 2021-09-28 07:00:04

“모든 여성에게 저렴하고 안전하며 합법적인 임신중지를”
9월28일은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지를 위한 국제행동의 날’(Day of Action for Access to Safe and Legal Abortion)이다. 지난 1990년 9월28일 라틴 아메리카와 카리브해 지역 여성단체들이 시작한 낙태죄 폐지 운동이 시초다. 2011년 재생산권을 위한 여성 글로벌 네트워크(WFNRR)는 이 날을 국제기념일로 선포했으며, 국내 여성계도 해마다 연대 목소리를 내고 있다. 세계 모든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과 재생산권을 보호하며, 저렴하고 안전하며 합법적인 임신중지를 보장하는 환경을 구축한다는 것이 슬로건이다.

이미지=INTERNATIONAL SAFE ABORTION DAY 공식 홈페이지

[쿠키뉴스] 한성주 기자 =낙태죄 폐지 10개월이 경과했지만 여성들은 여전히 안전하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임신을 중지할 수 없다. 

현재 국내에서는 누구나 임신중지 수술을 받을 수 있다. 형법 제269조 1항 ‘자기 낙태죄’와 제270조 1항 중 ‘의사 낙태죄’가 올해 1월1일부터 폐지되면서다. 이에 따라 본인의 의지로 임신중지 수술을 받은 여성, 임신한 여성의 요청으로 수술을 진행한 의사는 처벌받지 않는다. 

하지만 안전하게 임신중지 수술을 할 방법을 찾기는 까다롭다. 임신중지를 위한 제도적 인프라가 없기 때문이다. 형법은 낙태죄 폐지 후 보완 입법이 이뤄지지 않았다. 임신중지 수술을 예외적으로 허용하는 조건을 나열한 모자보건법 14조만 무용하게 유지되고 있다. 즉, 임신중지에 대한 처벌은 없어졌지만 임신중지가 필요한 여성들은 제도권 밖에 10개월째 방치된 상태다. 

보완 입법을 위한 법안은 기약 없이 국회를 계류 중이다. 정부안은 △인공임신중절의 방법으로 수술 외에 약물 투여 등 의학적으로 인정된 방법을 추가하고 △임신의 유지·종결에 대한 상담 업무를 수행할 기관을 마련한다는 내용이 골자다. 서정숙 조해진 국민의힘 의원은 임신중지 방법과 수술 실시 의료기관에 대한 개정안을 각각 대표발의했다. 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이은주 정의당 의원 등은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건강권에 집중한 개정안을 각각 대표발의했다. 이들 법안은 모두 국회 상임위원회를 떠도는 중이다.

건강보험 적용 여부는 미지수다. 임신중지 관련 의료행위에 대한 구체적인 급여 기준은 물론, 급여화에 대한 사회적 합의도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급여화를 제안하는 이들은 임신중지 관련 의료행위를 건강보험 제도에 포괄해 여성의 건강권과 재생산권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금까지 임신중지 수술이 건강보험 체계 밖에 남겨져 비용을 통제할 수 없었고, 안전성을 담보하기 어려웠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반면 일각에서는 임신중지 수술이 필수적 의료행위가 아닌, 개인의 선택으로 실시하는 의료행위라는 점을 들어 건강보험 급여 적용에 반대한다.   

임신중지 약물의 연중 국내 도입 가능성도 불투명하다. 국내 기업인 현대약품이 해외에서 상용화한 임신중지약 ‘미프진’의 국내 판권을 사들여, 올해 7월 ‘미프지미소’로 식품의약품안전처에 품목허가를 신청한 상태다. 하지만 국내 임상시험(이하 가교임상) 절차를 두고 의견이 갈려 허가 절차가 교착 상태다. 가교임상을 생략하면 국내 도입이 앞당겨지지만, 우리나라 국민의 인종적 특성에 따라 나타날 수 있는 부작용에 대한 위험성을 감수해야 한다. 가교임상을 실시하면 도입 시점이 늦어지지만 약물 사용의 안전성을 제고할 수 있다.

법이 바뀌어도 여성의 건강권은 여전히 불안한 환경이다. 전문가들은 낙태죄 폐지로 달라진 것이 없다고 지적한다. 김재연 대한산부인과의사회장은 “법률을 차치하고 의료 현장에서 체감하는 차이점이 전혀 없다”며 “임신중지가 불법이 아니게 된 것일 뿐, 이를 실행하기 위한 구체적인 제도와 합의는 여전히 부재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김 회장은 “임신중지 수술은 낙태죄 폐지 이전처럼 각 의료기관의 의지에 따라 이뤄지고 있고, 임신중지 약물은 인터넷에서 불법적으로 거래된다”며 “국민의 건강권을 제대로 보장할 수 없는 환경이 지속되는 상황”이라고 비판했다. 

새로운 법도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김제이 한국여성민우회 여성건강팀 상근 활동가는 “정부는 지난 10개월간 임신중지를 어떻게 공공의료서비스 체계에 포함시킬지 구체적인 방안을 도출했어야 한다”며 “임신중지 약물을 안전하고 신속하게 도입하고, 접근성을 높일 방법에 대한 고민도 필요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런 논의가 전혀 선행되지 않은 상태로는 입법이 된 이후에도 그 법이 실효성 있게 작동하지 못한다”며 “일선 의료기관에서는 구체적 지침이 없어서 임신중지 관련 의료행위를 실행할 수 없다는 입장으로 일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 활동가는 “시대착오적인 허용·규제 프레임에서 벗어나, 임신중지를 기본권으로 이해하는 발전적 시각을 갖고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의 혼란은 1953년 도입된 낙태죄가 폐지되기까지 66년동안 임신 당사자인 여성의 건강권이 공론장에 등장하지 못한 결과라는 지적이다.  

castleowner@kukinews.com
한성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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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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