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표 찍기 시대에 미래는 없다

좌표 찍기 시대에 미래는 없다

기사승인 2022-09-22 11:22:29
그래픽=이해영 디자이너


‘제보합니다’

메일함에 새로운 알림이 떴지만, 마우스 위 손가락은 그대로 멈춰있다. A기자는 언제부터인가 반가운 제보 메일도 선뜻 누를 수 없다. 제보로 위장한 악성 메일 때문이다. “꼴페미 기레기 O아….” 이번에도 예상은 적중했다. 여성혐오 표현과 욕설이 가득했다. 젠더 이슈를 담은 기사를 쓰고 난 직후 받은 메일이었다.

페미니즘을 공격하는 백래시(사회적 진보·변화에 대한 반발하는 심리·행동) 현상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자신의 생각과 다른 목소리를 냈다는 이유에서다. 온라인상에서 백래시는 괴롭힘으로 진화한다. 특정 기사·콘텐츠 주소를 공개해 댓글 작성을 유도하는 이른바 ‘좌표 찍기’를 통해 언제 어디서든 몰려가 누군가를 비난할 수 있다. 직성이 풀릴 때까지 무차별적인 인신공격이 가능하다.

기자는 핵심 타깃이다. 한국기자협회와 한국여성기자협회가 지난 4월 현직 기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 중 75.2%가 지난 1년간 온라인 공격을 당한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댓글을 통한 조롱·모욕·협박, 신상털기, 성적 수치심 유발 등 피해 유형은 다양했다. 대다수 보도 내용에 반대한다는 항의 표시다.

신상·얼굴 공개에도 취약하다. 기사 주소가 공유될 때, 기자 이름·얼굴·개인 정보 등이 함께 게재되는 경우가 많은 탓이다. 기자들의 이름과 이메일, 사진은 신문에 인쇄될 뿐만 아니라 소속 언론사 웹사이트, 포털 사이트 등에 노출된다. 공개된 정보는 범죄에 악용될 여지가 있어 공포감은 배로 커진다. 

이런 사태가 벌어진 데는 언론의 책임도 있다. 객관적이고 공정한 보도는 언론의 숙명이다. 이를 지키지 못한 경우, 독자들의 비판은 받아야 마땅하다. 문제는 특정 주제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한 온라인 괴롭힘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특히 젠더 이슈를 다루는 여성 기자들의 고민이 깊다. 편향된 시각을 담지 않기 위해 기사에 들인 노력마저 물거품이 될 때가 많다. 여성 인권 향상을 위한 내용이나 출산·군 복무 등 민감한 사안이 담긴 글에는 어김없이 집단 항의가 뒤따른다. 온라인상에서 좌표가 찍히면 상황은 악화한다. 신체 부위를 언급한 성희롱은 기본이고 범죄 협박도 당한다. 같은 내용의 기사를 작성해도 여성 기자와 남성 기자가 경험하는 피해 유형, 빈도에서 차이가 나기도 한다.

3년 차 기자 이모씨는 “젠더 이슈가 담긴 기사를 쓰고 좌표가 찍혀 고생한 경험이 있다. 포털에 공개된 프로필 사진까지 함께 첨부돼 악성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며 “이제는 이름을 보고 여성인 것을 간파해 다는 댓글이나 제보로 위장한 성희롱 메일이 익숙할 정도”라고 하소연했다. 국내 일간지에 재직 중 김모씨도 “기자가 된 이후 극도로 얼굴 및 신상 공개를 꺼리게 됐다. 온라인 커뮤니티에 좌표가 찍혀 고통받는 여성 기자를 여럿 봤기 때문”이라며 “나도 모르게 위축될 때가 있다”고 토로했다. 

이들 사례가 끝이 아니다. 관련 실태를 짚은 연구 보고서까지 등장했다. 20명의 여성 기자를 인터뷰한 내용이 담긴 ‘여성 기자 온라인 괴롭힘에 관한 저널리즘 사회학적 연구’라는 제목의 보고서다. 악성 댓글, 이메일 등을 통한 혐오·성희롱성 메시지, 온라인상 개인 신상·얼굴 공개 및 오프라인 공격. 20명의 여성 기자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자신과 주변이 겪은 괴롭힘에 대해 토로했다. 

그래픽=이해영 디자이너


페미니즘에 대한 반발은 현재진행형이다. 반여성주의 단체까지 등장했다. 이들 단체는 자신들의 이념 및 행위가 정당하다는 입장이다. 한 반여성주의 카페 대표는 공식 온라인카페 공지글을 통해 “남성연대는 권력화된 페미니즘에 반대하는 조직이다. 세상의 모든 페미니즘에 반대하는 조직이 아니다”라고 운영 방향을 밝히고 있다.

실상은 다르다. 이들이 운영하는 공식 카페에는 별도의 △제보·좌표 △페미기사·매스컴 게시판이 마련돼있다. 이곳에서는 젠더 이슈와 관련한 기사·글 링크를 회원들끼리 공유하는 좌표 찍기가 이루어진다. 타깃은 이들 단체의 주장처럼 권력화한 페미니즘에 국한하지 않는다. 젠더 이슈를 부각한 내용이 아니더라도 여성과 관련된 주제를 다루면 표적이 된다. “페미니스트들이 점령한 기사를 정화해달라. 페미니즘에 반대하는 댓글 지원이 필요하다” 등의 글을 올려 도움을 요청하는 식이다. 첨부된 링크를 타고 넘어간 불특정 다수는 수백·수천 개의 악성 댓글을 달며 공격에 나선다. “페미니즘은 정신병”, “여성혐오는 근거 없는 피해의식” 등의 표현을 통해 반페미니즘 정서를 확산시킨다. 때로는 욕설과 인신공격 등 언어폭력도 서슴지 않는다. 

페미니즘을 향한 백래시는 더 이상 공정 혹은 역차별의 이름으로 분노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혐오·차별을 무기 삼아 이견 자체를 용납하지 않는 구도로 변질했다. 윤김지영 창원대학교 철학과 교수는 “한국의 페미니즘은 강한 백래시에 직면한 상태다. 페미니스트 개개인을 낙인찍어 집단 공격하는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어 “페미니즘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이들을 압박해 의견 제시 자체를 위축시키고, 다시 남성 중심의 담론을 펼치고 싶은 심리에서 나온 현상”이라고 말했다.

현재 한국 사회 페미니즘 백래시 현상은 페미니즘이 잘못됐다는 집단적 확신만 가질 뿐 다름에 대한 인정이 빠져있다.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규정하고, 이견을 거부하는 사회에 미래는 없다. 전문가들의 의견도 다르지 않다. 허민숙 국회 입법조사처 조사관(여성학 박사)은 “자신과 다른 의견을 냈다는 이유만으로 집단 사이버불링을 가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며 “조직적으로 누군가를 표적 삼아 공론장에서 밀어내는 것은 엄연한 인권침해이자 범죄”라고 질타했다. 이어 “이는 개인에게 엄청난 정신적 외상을 입힐 뿐 아니라 사회 발전에도 해를 끼친다”라고 지적했다.

제도 개선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윤김진서 유니브페미 대표는 “한국 사회는 혐오 표현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어디까지가 혐오이고 표현의 자유인지 판단 기준이 모호한 상태”라며 “이를 명확하게 규정하는 사회적인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필요하다면 법적 제재까지 가할 수 있도록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쿠키뉴스 특별취재팀 spotlight@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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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취재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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