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0.81.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회원국 가운데 1명을 밑도는 유일한 나라다. 초저출산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정부와 국회가 해결책을 내놓고 있다.
일각에서는 문제 해결을 ‘저출산’ 용어 변경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저출산이라는 용어가 여성에게 인구감소의 책임을 돌리는 표현이라는 지적이다. 성차별적 요소를 함의하고 있는 ‘저출산’ 용어를 ‘저출생’으로 바꿔 신생아가 줄어드는 현상 자체에 주목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여성에 책임 전가’ 저출산 대신 저출생… 인식 제고 움직임
13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저출산’ 용어를 ‘저출생’으로 바꾸는 내용의 저출산·고령사회기본법 일부개정안이 21대 국회에 4건 발의됐다. 더불어민주당 박광온·강민정·양금희 의원안과 국민의힘 안철수 의원안이다. 여야 가리지 않고 개정에 공감대를 형성한 셈이다.
법안 발의 취지는 같다. ‘저출산’이라는 용어가 초저출산 현상의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하는 의미가 담겼기 때문에 개정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출산은 ‘아이를 낳음’, ‘출생’은 ‘세상에 나옴’이라는 뜻이다. 이에 저출산은 여성이 아이를 적게 낳는 것에, 저출생은 출생인구 감소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해석이다.
양금희 의원은 “인구감소 현상과 관련하여 여성에 대한 차별적인 인식이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고 인구감소의 책임이 국가에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개정하려 한다”고 제안 이유를 밝혔다. 강민정 의원도 “출산 장려 정책에서 벗어나 모든 세대의 삶의 질을 높이는 방향으로 저출산 정책의 패러다임 전환에 나섰음에도 현행법은 저출산 해결 정책의 변화된 패러다임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안철수 의원은 용어에 대한 인식 제고가 출생률 증가로도 이어질 수 있다고 기대했다. 안 의원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 국가들 중 성평등 수준이 높은 국가들이 출산율도 상대적으로 높다. 한국은 OECD 국가 중에서 터키 다음으로 성평등 수준이 낮으며 출산율은 가장 낮은 국가”라며 “우리나라에서 저출산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성평등 문화를 확산·정착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미 일부 지방자치단체에선 저출생으로 용어를 변경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의 검토보고서에 따르면 서울시를 비롯한 전국 5개 시·도 및 16개 시·군·구가 조례에서 저출산 대신 저출생을 사용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도 공식 정책용어는 아니지만 주요 캠페인 등을 통해 ‘저출생’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저출산→인구미래전략… 인구감소 대응 패러다임 전환 시도
현재 현행법과 행정·정책에서는 저출산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저출산·고령화사회기본법’ 법안에 ‘저출산’으로 명시돼 있는 탓이다. 저출산 문제 해결 컨트롤타워인 대통령 직속기관 명칭 역시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다.
최근엔 저출산·고령사회기본법을 ‘인구미래전략기본법’으로 인구위기 대응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시도도 있다. 김정재 국민의힘 의원은 저출산·고령사회기본법을 ‘인구미래전략기본법’으로,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를 ‘인구미래전략위원회’로 개정하는 내용의 저출산·고령사회기본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저출산·고령화 대응에 중심을 두기 보단 변화하는 인구구조에 맞춰 정책을 세워야 한다는 취지다.
김 의원은 “‘저출산’이라는 용어는 여성에게 ‘출산을 강요한다’는 인식을 준다는 비판도 꾸준히 제기돼 왔다”며 “시대의 흐름에 맞춰 변화하는 인구구조에 따른 국가대응 전략을 수립하는 등 미래를 대비하는 포괄적인 인구정책을 마련할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는 인구문제 전반을 아우르기 위한 명칭 변경이라며, 법안 발의 취지는 위원회의 공식 입장은 아니라고 분명히 해뒀다. 김영미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은 “저출산과 고령화에 한정 짓기보다 인구정책 전반에 대해 다루기 위해 명칭 변경을 제안한 것”이라며 “저출산이 여성에 출산을 강요한다는 인식을 준다는 비판에 대해선 검토하지 않았다. 법안에 관해 위원회 차원에서 관여하진 않았다”고 설명했다.
학계선 ‘출산율-출생률’ 다른 개념
전문가들 의견은 분분하다. 정익중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저출산은 여성만의 문제로 치환될 수 있는 용어라, 저출생이라는 중립적 용어로 바꾸자는 논의가 나온 것”이라며 “저출생 문제 극복은 여성과 남성이 같이 고민해야 할 영역이기 때문에 인식 개선의 차원에서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반면 용어를 바꿔 부르는 것이 출산율 제고에 긍정적 효과를 불러일으키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왔다.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출산율보다 출생율에 초점을 두면 사태의 심각성에 대해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도움이 될 순 있다”면서도 “출생율이 더 성평등한 단어로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학계에서는 출산율과 출생률을 구분해서 쓰고 있기 때문이다. ‘합계출산율’과 ‘조출생률’이 대표적이다. 합계출산율은 여성 1명이 가임기간(15세~49세) 동안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출생아 수를 나타낸다. 조출생률은 인구 1000명당 새로 태어난 사람의 비율을 말한다. 2021년 한국 합계출산율은 0.81명, 조출생률은 5.1명으로 다른 개념이다.
정 교수는 “2016년 대한민국 출산지도를 발표하는 등 과거 정부에서 여성을 아이 낳는 존재로 정책 대상화하는 맥락이 덧씌워지면서 저출산보다 저출생 용어가 더 적절하다는 인식이 생긴 것”이라며 “서울시에서 성평등 언어사전을 발표하며 저출산을 저출생으로 바꾸자고 했는데, 실제 정책은 성평등적으로 바뀌었는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출산율보다 출생률이 더 성평등적 용어는 아니다”라며 “특히 여성 개인이 아이 낳지 않는 이유를 성평등 관점에서 들여다보기 위해 저출산은 필요한 개념이다. 용어 변경이 오히려 근본적 문제 해결을 위해 살펴봐야 할 맥락을 지울 수 있다”고 강조했다.
복지부·여가부, 사실상 반대… “용어 변경 시 혼란 야기”
국회 복지위는 검토보고서에서 “저출산이 여성만의 문제가 아닌 사회전체의 구조적·종합적인 문제라는 인식변화를 유도하는 방안의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개정취지는 타당한 측면이 있다”고 평가헀다.
다만 “‘저출산’이라는 용어는 오랫동안 법령이나 정책 등에서 공식화되어 사용되어 오고 있는 점, 이미 정책의 흐름이 임신, 출산을 개인의 선택으로 존중하되 구조적인 사회적, 경제적 제약을 완화하려는 방향으로 전환되고 있는 점 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보인다”고 지적했다.
소관 부처인 보건복지부와 여성가족부도 사실상 반대 의견을 냈다. 복지부는 복지위 검토보고서에서 “저출생은 중립적인 용어로 생각되나, 합계출산율의 수준에 따라 정의되는 ‘저출산’과 달리 저출생을 법적으로 정의할 근거가 아직 불분명하다”며 “학계에서는 출산과 출생을 구분하고 있는 점 등을 감안할 때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의견을 냈다.
여가부도 “저출산 용어가 이미 출생아 수가 적다는 의미로 전세계적으로 통용되고 있어 용어 변경 시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며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했다.
김은빈 기자 eunbeen1123@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