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로 장애를 가진 지 7년 만에 집 밖으로 나왔어요. 가족 차를 타고 나오니 7년 전 허허벌판이던 동네에 큰 빌딩들이 생겼더라고요. 변화된 세상을 눈으로 보고 ‘이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뭐부터 해야 할까’라고 생각하자 운전이 떠올랐어요. 운전을 하게 되니까 새 세상에 온 것 같았죠.”
정지영 장애 여성 네트워크 활동가는 처음 운전하던 순간을 “굉장히 기뻤다”라고 표현했다. 그에게 운전의 의미는 단순히 이동수단이 생긴 것에 그치지 않는다. 운전을 통한 자유로운 이동은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고 자존감을 높이는 지렛대가 됐다. 또한 사회활동 범위를 확대했다. 6일 서울 종로구 장애 여성 네트워크에서 쿠키뉴스와 만난 장 활동가는 “장애 여성의 평등할 권리를 위해 활동가로 적극적인 외부활동을 하는 데에도 운전이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다만 정 활동가는 자신의 경우를 ‘행운의 케이스’라고 잘라 말했다. 많은 장애 여성이 집 안에 방치되거나 외출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운전은커녕 이동수단에 대한 고민조차 하지 못하는 장애 여성이 여전히 많다.
갇혀있는 장애 여성, 더 가혹한 교육·고용 환경
15.9%. 한 달 동안 거의 외출하지 않는 장애 여성의 비율이다. 한국장애인개발원에서 발표한 2021 장애인삶 패널조사에 따르면, 장애 여성 중 절반(50.1%)은 거의 외출하지 않거나 최대 주 1~2회 외출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장애 남성의 경우 10명 중 6명(63.9%)은 매일 외출하거나 주 3~4회 외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동권과 교육·고용은 닭과 달걀 같은 관계다. 자유롭지 못한 이동과 열악한 교육·고용 수준 중 뭐가 더 장애 여성을 힘들게 하는지 판단하기 어렵다. 교육수준과 근로수준은 더 열악해졌다. 보건복지부의 2020년 장애인 실태조사 결과 대학교 이상의 교육을 받은 남성 비율은 18.7%, 여성은 8.2%로 나타났다. 학교를 전혀 다니지 못한 ‘무학’의 경우 남성은 2.9%인 반면, 여성은 16.9%에 달했다.
고용시장은 특히 여성 장애인에게 더 가혹하다. 한국장애인고용공단에서 발표한 2022년 상반기 장애인경제활동실태조사에 따르면, 장애 여성의 경제 활동 참가율(24.3%)과 고용률(23.1%)은 남성의 절반(각각 48.3%, 46.2%)에 불과했다.
이동권 지원 절실… 특수차량 지원 부족
장애 여성의 교육·의료 접근성을 높이려면 이동권 향상을 위한 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다. 특히 자동차는 장애인 10명 중 3명이 외출 시 이용할 정도로 이동 수단 중 비중이 높다. 휠체어 지원금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저상버스나 지하철·장애인콜택시 등 다른 교통수단은 승차의 어려움, 불편한 동선, 탑승 제한요인 등 제한 조건이 많다
운전면허를 취득하는 장애인 숫자는 매년 늘고 있다. 도로교통공단에 따르면 장애인 운전면허 취득을 돕는 장애인운전지원센터를 통해 지난해 1308명(1종 344명·2종 964명)이 면허를 취득했다. 2020년엔 951명, 2021년엔 1124명이었다. 그만큼 운전에 대한 관심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애인운전지원센터 면허를 취득할 수 있지만 센터 수가 적다. 장애인운전지원센터는 장애인용 특수 제작 차량과 전문 교육 강사를 갖추고 있다. 면허 취득 상담과 장애 유형에 적합한 차량 개조를 안내받을 수 있다. 다양한 도로주행 교육도 무료다. 다만 전국 12곳에 불과하다. 이중 수도권은 서울 강서, 경기 남부(용인), 경기 북부(의정부), 인천 등 4곳에 불과하다.
면허를 취득한 이후도 문제다. 일반 상용차를 운전하기 힘든 장애인들에게는 휠체어 탑승 장비나 핸드컨트롤러 등이 부착된 차량이 필수다. 차량 탑승 후 휠체어를 차량 내부에 수납하는 보조기기인 크레인은 350~750만원에 달해 경제 부담이 크다. 하지만 장애인용 특수차량에 대한 지원은 매우 한정적이다.
장애인용 차량 개조 지원금은 일하는 장애인에게만 지급된다.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은 장애인 고용촉진과 직업생활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근무 중인 장애인에게만 1인당 1500만원(중증 2000만원) 선에서 차량 개조 지원금을 주고 있다. 보건복지부에서 보조기기 교부사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차량용 보조기기나 장애인용 특수차량은 포함돼 있지 않다. 미국과 일본 등 해외 선진국이 이 같은 특수성을 인정해 장애인이 처음 차량을 구입할 때부터 지원을 아끼지 않는 것과 비교된다.
장애에 배려없는 사회
면허를 따고 차량을 구입해 이동이 자유로워져도 여전히 장애인에게 불친절한 것 투성이다. 휠체어를 타는 장 활동가는 “요즘 많이 생긴 셀프주유소를 이용하기가 너무 힘들다”며 “차에서 내려 휠체어를 꺼내야 하고 (휠체어에 앉은 상태에선) 주유기 화면이 너무 높다”고 말했다.
장 활동가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엔 직원 벨을 누르거나 클랙슨을 살짝 눌러야 하지만, 그마저 힘들 때가 있다”며 “특히 고속도로엔 셀프 주유소가 많다. 셀프 주유소가 아닌 주유소를 찾는 것도 일”이라고 했다.
자동차를 탄 채 음식이나 음료를 주문하는 ‘드라이브 스루’ 역시 장애인에게 문턱이 높다.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는 드라이브 스루 방식으로 이용 제한을 당한 청각·언어 장애인의 진정에 대해 ‘차별이 아니’라고 기각했다. 그러나 인권위 행정심판위원회는 지난해 12월 인권위 결정을 취소하고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동등한 서비스를 누리도록 해야 한다는 취지의 판단을 내놨다.
장애인이 ‘보통의 삶’을 살기 위해 이동권은 보장되어야 한다. 장 활동가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제가 가족에게 민폐를 끼치고 국가의 복지 서비스만 이용해야 하는 사람인 줄 알았어요. (운전을 시작하면서) 제가 이동할 수 있고, 이동수단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게 되자 생각이 달라졌어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더라고요.”
임지혜 기자 jihy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