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이 된다고 어른이 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점점 취업도 결혼도 쉽지 않잖아요. 어른과 아이의 경계가 무너지는 것 같아요.” - 최모(25·여·대학생)씨
어릴 땐 스무 살이면 어른이 되는 줄 알았다. 사회초년생이 된 후엔 서른이 넘으면 어른이 되는 줄 알았다. 주변 청년들을 둘러보면 이미 다 어른이다. 정작 그들은 고개를 젓는다. 과거와 크게 달라진 게 없다고 느낀다. 나이를 먹고,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해도 마찬가지다.
스스로를 어른이라 생각하지 않는 청년들이 늘어나고 있다. 지난 2월 유민상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이 발표한 ‘성인 이행기 청년의 결혼과 출산 인식과 함의’에 따르면, 스스로 성인이 됐다고 자주·항상 느끼는 비율은 30세(56%)에서야 절반을 넘었다. 스무 명의 청년들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른인가요. 지금, 어른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완전히 독립하지 못했어요”
박모(26·남·대학생)씨는 아직 부모님과 함께 산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지만, 독립해서 혼자 살려면 부모님 지원이 필요하다. 그는 “경제적 독립도, 정신적 독립도 하지 못했다”며 스스로 어른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에겐 스스로 모든 걸 해결해야 어른이다.
독립은 어른의 기본 조건이다. 최모(25·여·대학생)씨 역시 “정신적, 금전적인 것 모두 부모님에게서 완전히 독립하지 못했다”며 “정확한 어른의 정의도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사회복지사 A(26·남)씨도 “부모님 지원 없이 살아가기 힘들다”는 점을 어른이 아닌 이유로 들었다.
스스로 어른이라 생각한다는 B(28·남·소방설비기사)씨에겐 직업을 가지고 경제 활동을 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는 “원하는 것을 주체적으로 할 수 있다”며 “스스로 행동에 책임질 수 있을 때 어른이라 느낀다”고 말했다. 경제적으로 독립한 상태라는 김모(33·남)씨 역시 “가정이나 회사 등 나와 다른 사람의 삶을 책임져야 하는 삶을 살 때”를 스스로 어른이라고 느끼는 순간으로 꼽았다.
지난해 결혼한 조모(27·여)씨 역시 스스로 어른이라고 생각했다. “학생 시절엔 뭘 하든 부모님께 확인받고 지원받았지만, 지금은 취업, 이직, 퇴사, 이사 등 큰 문제들을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을 진다”며 “요즘 청년들은 삶은 온전히 책임지기 어려워한다. 어른이 되는 걸 회피하고 두려워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아직 아무것도 이룬 게 없거든요”
사회적으로 부모에게서 독립하는 시기가 늦어지는 영향을 언급하는 답변도 많았다. 지난 3월 국무조정실이 발표한 ‘청년 삶 실태조사’(지난해 7~8월 1만5000명 대상)에 따르면, 만 19~34세 청년 57.5%는 부모와 함께 살고 있었다. 청년 1인 가구는 22.6%에 불과했다. 부모와 함께 사는 청년 중 67.7%는 ‘아직 독립할 구체적인 계획이 없다’고 응답했다.
스스로 어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이하림(26·여·회사원)씨는 “취업난, 늦어진 경제적 독립 때문에 어른과 아이의 경계가 흐려진 것 같다”며 “캥거루족이 많아지고 있다”고 짚었다. 김모(33·남)씨도 “날로 비싸지는 주거비, 물가, 취업난 때문에 독립하지 못하는 20~30대가 많다”며 “출산률 저하, 비혼 증가처럼 점점 더 개인주의화 되는 사회적 흐름이 청년들이 성숙한 모습을 갖추는 데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과거에 비해 정신적, 물질적으로 안정되는 단계의 진입 장벽이 높아졌다는 의견도 나왔다. 서울 은평구에 사는 C(26·여)씨는 “내가 보고 자란 어른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빠른 시기에 결혼하고 집을 샀다”며 “그들에 비해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어른이라고 느끼기 힘들다”고 말했다. 이어 “진로나 인생 목표 등을 정하지 못하고 불안정하게 사는 20~30대들이 많다”며 “스스로를 어른이라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지만, 그들 탓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치료학과 교수는 “과거에는 어린 시절 추억이나 기억이 주요인이었다면, 지금은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받는 부담감 때문에 어른이 되기를 피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청년들은 독립하거나 무언가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부담을 느낀다”며 “이런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 기성세대의 책임”이라고 진단했다.
“어른이 되지 않는 것, 나쁘지 않아요”
어른으로 사는 건 쉽지 않다. 그럼 꼭 어른이 돼야 하는 걸까. 자신을 모험가라고 소개한 D(29·남)씨는 아이로 살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는 “어른이 되는 과정이 두려워서 어른이길 포기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며 “사회가 날 어른이(어른+아이)로 만들었다. 어른이 되지 않는 것도 제법 나쁘지 않은 것 같다”라며 미소 지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마음의 나이는 아직 과거에 머물러 있다. 조모(31·여)씨는 아이스크림, 떡볶이처럼 어릴 적 좋아했던 음식을 먹을 때 행복했던 과거를 떠올린다. 조씨는 “어릴 적 기억하는 내 모습과 똑같은 지금의 나를 마주할 때 어른이 아니라고 느낀다”고 말했다. 나이를 먹어도 순수한 즐거움과 소소한 행복, 유치한 동심과 마주할 때 어른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얘기다.
자신을 ‘초딩’이라고 표현하는 청년들도 있었다. 이들에게 어른은 미래를 설계하는 사람이다. 조모(28·남)씨는 “충동적 소비를 하는 편”이라면서 “미래를 생각하고 돈을 쓰는 사람”을 어른이라고 말했다. 유모(31·여)씨는 “부동산 얘기를 하거나 노후 걱정할 때를 제외하곤 아직 철이 없다”고 털어놨다.
“어른의 의미가 달라졌어요”
청년들이 생각하는 어른의 기준은 ‘독립’만이 아니었다. 정신적으로 성숙하고 안정된 사람을 어른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다. 청년들은 “본인 잘못에 변명하지 않고 책임지는 사람”, “주변을 챙기고 돌보는 여유가 있는 사람”, “자신뿐 아니라 가정, 회사 등 무언가를 위해 책임지고 희생하는 사람”, “앞가림 잘하고, 예의 있고, 생각이 깊은 사람” 등을 어른이라 했다. 또 “미래를 위해 계획적으로 소비하는 사람”, “미래 계획이 확실한 사람” 등을 언급한 청년들도 있었다.
지금 시대에 맞게 어른의 의미를 다시 정의하려는 시도도 눈에 띄었다. C씨는 “지금까지 사용된 ‘어른스럽다’라는 단어의 정의가 ‘자기 희생’에 가까웠다고 생각한다”며 “결혼, 출산, 가정을 위한 희생 같은 것들의 기존 어른의 의미였다. 시대가 변하면서 어른의 의미도 자연스럽게 달라진 것 아닐까”라고 질문했다.
E(31)씨는 “예전에는 사회가 ‘너 이제 어른이야’라고 강요했다면, 지금은 자아를 탐색하고 알아가는 시간을 갖는 사람들이 많다”고 말했다. 조모(31)씨는 “지금은 스스로에게 솔직해진 시대”라며 어쩌면 과거에도 억지로 어른이 된 청년들이 있었을 거라 추측했다. 그는 “사회가 정한 나이에 맞는 모습을 유지하다가도, 내 모습 그대로를 오픈하는 일이 과거보다 쉬워진 것 아닐까 싶다”고 설명했다.
이예솔 기자 ysolzz6@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