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가-투자자간 소송’(ISDS)에서 한국 정부가 약 1300억원을 물어주게 됐다. ISDS는 외국인 투자자가 투자국에서 부당한 대우나 정책 때문에 손해를 입었을 때 제기할 수 있는 국제 분쟁조정절차를 말한다.
21일 법무부에 따르면 상설중재재판소(PCA)의 엘리엇 사건 중재판정부가 엘리엇 측 주장 일부를 인용해 우리 정부에 5358만6931달러(약 690억원·달러당 1288원 기준)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판정했다고 밝혔다. 손해배상금은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 7억7000만달러(약 9917억원)의 약 7% 수준이다.
여기에 이자와 법률비용까지 고려하면 한국 정부가 부담해야 하는 금액은 1300억원에 달한다. 법률 비용은 정부가 엘리엇에 2890만달러(약 372억5000만원)를, 엘리엇은 정부에게 345만달러(약 44억 5000만원)를 각각 지급하게 된다.
엘리엇의 소송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서 출발한다. 2015년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은 ‘1 대 0.35’의 비율로 합병을 추진했다. 이는 제일모직 1주를 새출 출발하는 합병 회사의 1주로 교환해 주지만 삼성물산의 1주는 합병 회사의 주식 0.35주로 바꿔주겠다는 말이다.
당시 제일모직 주가가 삼성물산의 약 3배 수준이었던 만큼 자본시장법에 부합한다. 하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 보면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해 삼성물산 주주들의 불만이 높았다. 엘리엇은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던 대주주로 이러한 합병에 반대했다. 삼성과 엘리엇은 합병 문제를 두고 주주투표까지 진행했다.
삼성과 엘리엇의 표싸움이 진행되자 국민연금공단의 결정이 중요한 변수로 등장했다. 국민연금은 삼성물산 지분 11.61%와 제일모직 지분 5.04%를 보유하고 있었다. 결국 주주투표결과 참석 주주의 69.53%의 찬성으로 합병은 가결됐다. 국민연금이 삼성 측의 손을 들어주면서 합병에 찬성한 것이다. 이로 인해 국민연금은 5000억대 손실을 본 것으로 알려졌다.
엘리엇 왜 손해배상 청구했나
엘리엇은 이를 두고 박근혜 전 대통령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뇌물을 받아 국민연금이 삼성 측의 손을 들어주도록 압박한 것으로 주장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보건복지부 장관을 거쳐 국민연금공단 수뇌부를 압박한 결과라는 주장이다.
실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삼성물산의 최대 주주인 국민연금공단에 제일모직 합병에 찬성하도록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혐의로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과 홍완선 전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장이 징역 2년 6개월의 처벌을 받았다.
엘리엇은 한국 정부가 국민연금공단 수뇌부를 압박한 결과 합병이 성사되었으며, 이에 따라 엄청난 투자 손실을 봤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는 한국의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위반인 만큼 한국 정부가 손해배상에 나서야 한다고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한국 정부는 엘리엇의 주장을 두고 특정 개인의 문제로 주장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보건복지부 전 장관 등이 합병 성사를 위해 압력을 행사했더라도 이는 개인들의 행위에 불과하다는 것. 따라서 한국 정부의 손해배상 책임이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한 정부는 당시 압력이 연금공단 투자위원회의 합병 찬성 결정에 실제로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으로 주장했다. 더욱이 당시 합병비율이 자본시장법에 합치하고 만약 당시 국민연금이 합병에 반대했다면 삼성그룹 17개 계열사의 주가 하락으로 더 큰 손실을 볼 수 있었다는 점을 피력했다.
2018년 시작된 양측의 ISDS는 중재판정부가 엘리엇의 주장을 일부 인용하면서 일단락됐다. 중재판정부는 한국이 ‘5358만6931달러 및 지연이자를 엘리엇에 지급하라’고 판정했다. 이는 당시 합병에 한국 정부의 책임이 일부 있다고 본 것으로 풀이된다. 다만 당초 엘리엇이 주장한 손해배상금의 7%만 인용된 만큼 한국 정부의 주장이 더 많이 받아들여졌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법무부는 중재판정부의 선고 세부 내용을 살핀 후 이의제기 신청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다. 법무부는 지난해 8월 론스타가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ISDS 선고에 대해서도 이의제기 신청을 한 바 있다. ISDS의 판정은 항소가 불가능한 단심제이나 판정의 취소를 신청할 수는 있다.
조계원 기자 chokw@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