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반도체 기업 브로드컴이 삼성전자에 부품 공급을 중단하거나 불공정 체결을 강요한 혐의로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제재를 받았다.
브로드컴이 시장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삼성전자를 압박하고 이른바 ‘갑질’로 공정거래법을 위반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번 공정위 조치로 삼성전자는 향후 브로드컴과의 법정다툼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공정위는 지난 21일 미국 반도체 기업 브로드컴이 갑질로 삼성전자를 압박해 자사에 유리한 장기계약(LTA)을 체결했다고 판단해 191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하고 시정명령을 내렸다.
공정위에 따르면 브로드컴은 2020년 3월 삼성전자와 스마트기기에 탑재돼 통신 주파수 신호 품질을 향상시키는 RFFE 부품 공급에 대한 장기계약(LTA)을 체결했다. LTA는 삼성전자가 2021년부터 3년 간 매년 브로드컴의 부품을 최소 7억6000만 달러 구매하고 구매 금액이 이에 미달하면 차액을 배상하는 내용이다.
브로드컴에 의해 강제된 LTA를 이행하기 위해 삼성전자는 당초 채택했던 경쟁사 제품을 브로드컴 부품으로 전환했다. 또 구매 대상이 아닌 보급형 모델에도 브로드컴 부품을 탑재하고 내년도 물량을 선구매하는 등 가용 수단을 총동원해 8억 달러의 부품을 구매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삼성전자는 2021년 출시한 갤럭시 S21에 당초 경쟁사업자의 부품을 탑재하기로 결정했으나 결국 이를 파기하고 브로드컴의 것을 채택할 수밖에 없는 등 부품 공급 다원화 전략을 지속할 수 없었다. 또 브로드컴의 부품은 경쟁사업자보다 비싸 단가 인상으로 인한 금전적 불이익도 발생했다.
아울러 LTA로 삼성전자의 부품 선택권이 제한되자 브로드컴의 경쟁사업자들은 제품의 가격과 성능에 따라 정당하게 경쟁할 기회를 빼앗겼다. 장기적으로는 부품제조사의 투자 유인이 없어져 혁신이 저해되고, 소비자에게 피해가 전가될 상황을 초래했다.
공정위는 이같은 브로드컴의 행위가 거래상대방에 대해 우월적 지위를 남용한 행위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공정위는 “이번 조치는 반도체 분야 선도기업이 자신의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거래상대방에게 불이익을 준 행위를 억제한 것으로 공정한 거래질서를 확립하고 경쟁 여건을 조성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며 “반도체 등 핵심 기반 산업 분야에서의 불공정 행위를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위법 행위에 대해서는 엄정하게 법을 집행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공정위 처분이 내려지면서 삼성전자와 브로드컴의 법정 공방이 예고되고 있다. 브로드컴은 과징금 처분 등을 취소해달라는 행정 소송에 나설 것으로 예상되면서 삼성전자 역시 브로드컴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할 것이란 이유에서다.
삼성전자는 추후 브로드컴을 상대로 강요된 LTA에 따른 손해를 배상하라는 민사 소송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앞서 삼성전자는 LTA로 인해 더 저렴한 타사 부품을 이용하지 못해 2억8754만달러(약 3855억원)의 추가 비용을 부담했고 3876만달러(약 520억원) 상당의 과잉재고도 떠안았다며 총 3억2630만달러(약 4375억원) 상당의 피해를 봤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일각에선 부품 독과점으로 인한 삼성전자의 피해 금액만 최소 2100억 원에 이르는 것을 감안하면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의견도 제기된다. 브로드컴의 올해 2분기 매출이 61억5000만달러(한화 약 8조2000억원)에 달한다는 점에서 과징금이 지나치게 적다는 평가다.
브로드컴은 공정위 심의 과정에서 해당 계약이 자발적으로 체결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자신들이 삼성전자를 상대로 갑질을 할 위치가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내부 업무 보고 과정에선 삼성전자에 대한 부품 공급 중단을 두고 ‘폭탄 투하’ ‘핵폭탄’ ‘기업 윤리에 반하는’ ‘협박’ ‘심각한 진퇴양난’ 등으로 표현했다.
삼성전자는 이런 브로드컴의 공급 중단 조치에 대해 ‘생산라인에 차질이 우려된다’ ‘가진 카드가 없다’ 등으로 언급하며 브로드컴에 끌려다니는 모습을 보였다.
동의의결 절차 개시 결정 과정에서 삼성전자 의견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점도 의문이라는 지적이다.
공정위 관계자는 “동의의결 절차 개시 때에도 의견 수렴 절차가 있는데 당시 삼성전자가 내부 사정으로 공식 자료를 내지 않았다”며 “동의의결 절차 개시 이후 비공식 의견을 제출했다”고 밝혔다.
김한나 기자 hanna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