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구원 류모(30)씨가 출근하는 오전 9시가 되면 고등학교·대학교 친구들이 있는 모바일 메신저 단체 대화방에 메시지가 쌓이기 시작한다. 특별히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다. 류씨는 “신변잡기 내용이 대부분”이라며 “주로 회사 욕을 많이 하는 편이다. 집단 독백처럼 각자 하고 싶은 말을 할 때도 있다”고 설명했다. 퇴근 시간이 되면 수백 개씩 쌓이던 단체 대화방도 잠잠해진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 9시, 대화방은 다시 살아난다.
직장에 출근한 시간대에만 모바일 메신저로 활발하게 대화하는 친구들이 있다. 일종의 ‘출근 친구’다. 직장에서 근무할 때만 대화하는 친구의 존재에 공감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장사라(가명·20대)씨는 “회사에서 일할 때 친구들과 더 활발하게 연락한다”라며 “나도 메시지가 오면 바로바로 답장하게 된다”고 말했다.
‘출근 친구’와 특별한 대화를 하는 건 아니다. 그래서 오히려 재밌다고 여기는 분위기다. 박모(28)씨는 “보통 오전 9~오후 6시에 일하는 직장인 친구들과 대화를 많이 한다”라며 “딱히 정해진 대화 주제는 없다. 회사 얘기를 할 때도 있고, 주말에 뭐 하고 놀았는지 같은 일상 얘기를 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제조업에 종사하는 이민하(가명·27)씨도 “주말에 어디 놀러 갔다거나, 어딜 갔는데 좋았다고 추천하거나, 일 때문에 어려운 점을 털어놓기도 한다”고 말했다.
온라인에서도 일할 때만 대화하는 친구가 있다는 내용의 글을 찾아볼 수 있다.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친한 친구인데 금요일 퇴근 이후에는 답 안하다 월요일에 출근하니 연락한다’는 글엔 “직장인은 그런 사람 많을 듯”, “내 친구도 그렇고, 나도 그렇다”는 등의 댓글이 달렸다. X(옛 트위터)에 한 누리꾼은 “직장인 친구와 맨날 ‘출근했냐’ 등의 대화만 반복한다”라며 “놀랍게도 서로 일할 때만 연락됨”이라고 적었다. “주말에 연락하는 게 진짜 사랑이다”라며 “평일 근무 시간에 하는 연락은 가짜”는 글도 있었다.
주로 근무 시간에 대화하는 친구가 있는 건 해외에서도 마찬가지다. 2019년 11월 뉴욕타임스에 올라온 ‘근무 시간에 친구랑 구글챗으로 대화하면 좀 그럴까요’라는 제목의 기사가 올라왔다. 한 해외 커뮤니티에 올라온 ‘일할 때 메신저로 친구랑 대화하면 나쁠까’라는 고민에 사람들은 “여기 그런 사람 한 명 추가”, “나도 일하는 내내 두 명의 친구와 구글챗을 한다. 일이 잘 안 풀리거나 할 때, 친구랑 대화하면 좀 괜찮다”는 반응을 남겼다. 미국 온라인 커뮤니티 디그(digg)에는 일하면서 몰래 사용할 수 있는 메신저 앱의 종류와 특징을 정리한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메신저 대화도 일의 연장…“퇴근 후 일 생각 싫어”
‘출근 친구’가 나타난 배경엔 모바일 기기의 발달로 출근과 퇴근의 경계가 불분명해진 시대적 변화가 존재한다. 과거와 달리, 언제든 모바일 메신저로 언제, 어디서든 업무 대화가 가능해지자 오히려 일과 삶을 구분하려고 노력하게 됐다. 박씨는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 출근 시간대에만 연락하는 게 습관이 됐다”라며 “의식적으로 하는 건 아니지만, 퇴근 이후나 주말에 가족과 시간을 보내면 휴대전화를 잘 안 보게 된다”고 설명했다. 장씨는 “퇴근해서까지 일 생각을 하고 싶지 않다”라며 “메신저를 열었을 때 업무 관련 메시지가 보이면 짜증이 난다. 그래서 일을 마치면 사적인 연락도 자연스레 미뤄두게 된다”고 설명했다.
퇴근 후엔 직장동료와 서로 연락하지 않는 것이 예의로 여겨진다. 퇴근·주말에도 편하게 연락을 할 수 있는지 여부가 친구와 직장동료를 가르는 기준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류씨는 “직장동료가 직급도 같고 동갑이라 출근해서 많이 대화한다”면서도 “하지만 회사가 아닌 밖에서는 만나지 않으니 집에 가면 아예 메신저를 안 보낸다”고 말했다. 어쩔 수 없이 주말에 연락하게 됐을 때 류씨의 직장동료는 “주말에 메시지를 보내게 해서 미안하다”라며 류씨에게 기프티콘을 보내기도 했다.
근무 시간이 아닐 땐 친구와 모바일 메신저 대신 SNS로 대화한다는 이들도 있다. 박모(26)씨는 “퇴근 이후나 주말에 친구에게 연락할 일이 있으면 SNS 메신저로 연락한다”고 했다. 그는 “사무실에서 일할 때는 바로 답장하는 편이지만, 퇴근해서는 여가에 전념하고 싶다”라며 “직장 동료들도 단체 대화방 대신 SNS 메신저를 많이 쓴다”고 덧붙였다. 최지혜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 연구위원은 “모바일 메신저가 주로 업무 기능으로 쓰이게 된 측면이 있다”라며 “업무와 일상을 구분하려고 의도적으로 퇴근 후 모바일 메신저를 차단하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전문가는 타인과의 대화 역시 하나의 일처럼 된 부분이 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치료학과 교수는 “모바일 메신저로 언제든 다른 사람과 대화할 수 있도록 연결돼 있다”라며 “너무 쉽게 연락할 수 있기 때문에 답장하는 일이 의무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출근 친구’를 통해 근무 시간과 온전히 자신만의 시간을 구분 지으려는 행동이 스트레스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유채리 기자 cyu@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