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당과 전공의 참여 없이 출범한 ‘여야의정 협의체’가 의료계 참여 중단으로 출범한 지 한 달도 안 돼 와해됐다. 의정갈등 문제는 풀기 어려워질 전망이다. 일각에선 예견된 수순이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2일 의료계에 따르면 대한의학회와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의대협회)는 1일 여야의정 협의체 참여 중단을 선언했다. 협의체는 당분간 공식 회의를 중단하고 휴지기를 갖기로 했다. 지난 11월11일 출범한 지 20여일 만이다. 여야의정 협의체는 의정갈등 이후 처음 생긴 정부와 의료계 간 공식 협상 창구라는 점에서 주목을 끌었지만, 대한의사협회와 전공의 등이 참여하지 않아 ‘반쪽짜리 협의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만희 국민의힘 의원은 협의체 회의 후 브리핑에서 “의료계가 2025년도 의대 정원 변경을 지속적으로 요청해 왔지만, 입시가 상당히 진행된 상황을 감안하면 현실적으로 수용하기 어려운 요구였다”며 “이러한 상황을 감안해 협의체 대표들은 당분간 공식적 회의를 중단하고 휴지기를 갖기로 했다”고 전했다. 이어 “합의된 회의 재개 날짜는 없다”면서 “휴지기 동안 정부와 여당은 의료계와 대화를 지속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어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는 2일 ‘지역소멸과 지역비례 선발제’ 국회토론회에 참석한 뒤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협의체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며 “정부와 의료계의 입장 차가 큰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여당은 그 차이를 줄이려고 노력했고 그 노력은 앞으로 계속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여당은 ‘휴지기’를 갖겠다고 표현했지만 의료계가 ‘참여 중단’을 선언한 이상 협의체가 다시 열릴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이진우 의학회장은 “더 이상의 협의는 의미가 없고, 정부와 여당이 이 사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며 “급박한 현실에서 유연한 정책 결정을 통해 의정 사태 해결 의지를 조금이라도 보여달라고 간절히 요청했으나 정부는 어떠한 유연성도 보이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앞서 의학회·KAMC는 협의체 참여 조건으로 △수업을 거부 중인 의대생 휴학 승인 △의대 정원 재논의 및 의사 인력 추계 기구 입법화를 위한 구체적 시행계획과 로드맵 설정 등을 제시했다. 하지만 정부는 입시 혼란과 수험생 피해 등을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2026학년도 의대 정원 협의 가능성만 열어두고 있다.
‘국민에게 성탄 선물을 안겨주겠다’며 협의체 구성을 강하게 밀어붙인 한 대표가 지난달 26일 열린 ‘경상북도 국립 의과대학 신설 촉구 국회 토론회’에서 한 발언은 의료계의 부정적 여론에 기름을 붓는 꼴이 됐다. 한 대표는 이 자리에서 “경북 국립의대 신설을 국민의힘 차원에서 강력하게 지원하고 지지한다”고 발언했다. 경북 지역 의료 수요가 대구 병원으로 쏠려있어 국립의대를 신설해 병원을 더 유치해야 한다는 것인데, 의대를 신설하겠다는 것은 곧 의대 정원을 늘리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의료계의 반발을 샀다.
야당과 전공의가 빠진 채 개문발차 한 협의체마저 좌초되면서 의정갈등 사태는 해를 넘길 것으로 보인다. 의료계 일각에선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정부·여당과 의료계 간 갈등의 골만 더 깊어지는 모양새다.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 비상대책위원장은 1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윤석열 대통령의 아집으로 여기까지 왔다. 이제 전적으로 정부와 여당의 책임”이라며 “현재로서 최선은 2025년도 의대 모집 정지다”라고 적었다.
차기 대한의사협회(의협) 회장 선거에 나서는 예비 후보자들도 정부·여당 비판에 가세했다. 주수호 전 의협 회장은 “유치원생도 믿지 않는 산타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운운한 것부터 유치한 짓이었다”면서 “엉킨 실타래가 더 얽히고설켜 다 버리기 전에 실뭉치를 자르고 잇는 수밖에 없다. 2025년 의대 입시 중지가 바로 그런 의미다”라고 주장했다.
강희경 서울의대·서울대병원 교수 비대위원장은 “두 단체(의학회·KAMC)의 결단을 존중하고 지지했으나 정부가 현 사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전혀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라며 “정부의 독선적인 태도가 사직 전공의들의 선택지를 명료하게 좁히고 있다”고 지적했다.
제21대 국회의원을 지낸 신현영 서울성모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쿠키뉴스와의 통화에서 “국민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줄 거였으면 정부·여당이 합의해 양보해서 하나라도 성과를 냈어야 했다”며 “의학회와 KAMC는 협의체에 들어갈 때 욕먹고, 나올 때도 욕먹어 젊은 의사들의 신뢰만 떨어뜨리게 됐다”고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