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단의 걸출한 이미지스트였던 박남수의 미국 이민(1975년)은 가까운 사람도 거의 모르던 결심이었다. 출국하는 김포공항에서 걸려온 작별의 전화가 전부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훗날 한국문단에 보내온 시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인사는 못하고 떠나가지만/ 통곡하며 갔다고 전하여 다오” 그는 끝내 한국을 방문하지 못하고 뉴저지 주에서 세상을 떴다.
국민일보가 찾아내 2월19일자에 첫 보도한 손창섭은 박남수보다 더욱 애석한 경우로 여겨왔다. 1973년 일본인 아내를 따라 일본으로 간 그는 지금까지 소식이 알려지지 않아 ‘한국문단의 미아(迷兒)’로 꼽혀왔다. 한국문단에서 그를 애석해 한 것은 물리적인 ‘실종’만이 이유가 아니다. 그토록 인간을 부정했기에 대단원을 장식할 작품이 남아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1953년 ‘문예’지를 통해 데뷔할 당시 소감에서 “돌 나무 염소 개 제비 두더지 노루, 하고 많은 물체 가운데서 어쩌자고 하필 인간으로 생겨났는지 모르겠다. 일찍이 나는 인간행세를 할 수 있다는 것에 조금도 자랑을 느껴본 적이 없다”고 썼을 만큼 인간에 대한 짙은 절망을 드러냈다. 문제의식으로 가득찬 작가의 절망이 훗날 어떻게 정리되는 지는 어느 사회든 문학사의 공통된 관심거리일 수밖에 없다. 혹독하게 절망한 작가일수록 인간을 깊이있게 다루기 마련이다.
그러나 국민일보가 찾아낸 손창섭은 너무 늦은 손창섭이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병상의 작가는 ‘손창섭’을 증거할 수 없었으며, 한국일보에 원고지를 우편 송고해 연재했던 ‘유맹’(1976)과 ‘봉술랑’(1978) 이후 남겨놓은 작품도 없었던 듯 하다. 사인을 부탁받고 “난 사인이 없는 사람이외다”라고 한 것이 유일한 말이었다고 한다.
그의 부인인 우에노 지즈코 여사는 인터뷰에서 자신의 오빠가 건너오라고 해서 자신의 고집으로 부부가 일본으로 왔다고 했지만 독특하기 짝이없는 작가 손창섭이 한국을 떠난 이유를 순전히 그것으로만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세계(언어)의 핵심을 떠나는 작가의 심연, 손창섭은 한국문단이 그것을 풀어갈 숙제를 남기고 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임순만 종교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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