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사회]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2일 밝힌 한국전쟁 중 재소자 집단 학살은 당시 정부가 자국민을 살해하는 데 최소한의 절차도 지키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유족들은 수십년간 진상규명을 요구했으나 군사정권 아래서 벽에 부딪혔다. 진실화해위는 본보가 2002년 4월 지적한 대구·대전·청주 형무소에서의 민간인 학살도 조사할 계획이다.
◇국가에 의한 불법 살인=진실화해위에 따르면 1950년 7∼9월 부산·경남 지역 형무소에서 희생된 민간인 중 사형수는 없었다. 사형수들은 이미 헌병대에 인계돼 총살된 이후였다. 학살된 민간인들은 대부분 육군형사법이나 국방경비법 등을 위반해 3년 이하 징역형을 받았다. 진실화해위는 "형이 확정된 기결수를 다시 처형한 것은 일사부재리 원칙에도 위반된다"며 "사실상 국가에 의한 집단 학살"이라고 말했다.
충북 영동 노근리 사건 등 다른 양민 학살과 비교하면 국가의 야만성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노근리 사건은 참전한 미군에 의해 일어났다. 다른 양민 학살은 군경이 전투에 나선 부대원을 통제하지 못한 상황에서 발생했다. 하지만 형무소 재소자 살해는 국가가 신병을 확보한 경우였다. 진실화해위가 "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비인도적"이라고 평가한 이유도 국가가 직접적으로, 폭력적으로, 적절한 절차를 따르지 않고 자국민을 살해했기 때문이다.
당시 부산으로 피신한 정부는 북한군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해 형무소에 갇힌 이른바 좌익 세력을 풀어줄 것을 두려워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군은 전쟁 발발 뒤부터 9·15 인천상륙작전 전까지 물밀듯 남한 지역을 점령했다. 진실화해위는 그러나 "치안이 유지된 부산과 경남지역에서 재소자들이 특별히 위험하다고 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
◇밝혀지지 못한 과거=형무소 재소자 학살을 포함한 민간인 학살 사건의 유족들은 1960년 진상규명을 시도했으나 5·16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군사정권은 특별조치법을 만들어 유족회 간부들을 혁명재판소에 회부했다. 1명은 사형을, 12명은 5∼1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군사정권 치하에서 더이상 진상규명은 시도되지 못했다. 그러던 가운데 본보는 2002년 4월 부산형무소 재소자 414명이 당시 이감 과정에서 사라졌음을 포착,이들이 집단학살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진실화해위 조사 결과 학살로 추정되는 부산형무소 재소자는 1500여명으로 본보가 보도한 414명보다 많았다.본보가 입수하기 어려웠던 국가기록을 진실화해위가 확보해 면밀히 살핀 결과다.이는 앞으로 진실화해위가 대구 대전 청주 등지의 재소자 학살을 더 정확히 규명해야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는 점을 의미한다.본보는 2002년 대구와 대전, 청주에서 각각 2500여명, 1800여명,200여명의 재소자가 학살됐다고 보도했다.본보는 일부 정부기록과 각종 민간기록에 의지해 그야말로 최소 숫자의 희생자를 추산했다. 국가기록에 대한 접근권이 훨씬 더 큰 진실화해위가 이 의혹을 파헤치면 희생자 숫자는 더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권기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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