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스포츠] “사실 연예인과 다를 게 뭐가 있나 싶습니다”
국내 한 연예기획사 관계자가 최근 김연아의 행보에 대해 내린 평가다. 한 대중문화평론가는 “‘피겨 여왕’이란 수식어가 주는 감흥은 사라지고, ‘스포테이너’란 단어만 떠오른다”며 “2010 밴쿠버 동계 올림픽에서 메달권에 진입하지 못한다면 엄청난 역풍을 맞을 것 같다. 요즘 김연아의 모습을 보면 정말 그렇다”고 말했다.
△스포테이너 된 피겨 여왕=김연아는 지난 3월 국제빙상경기연맹(ISU) 2009 세계피겨선수권대회 정상을 차지한 후 사실상 준(準) 연예인이 됐다. 지난 1일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월드컵 최종예선 남북전에 참석한 김연아를 두고 정부 한 고위관계자는 “오늘 주인공은 김연아”라고 말했다.
다음 날인 2일 고려대학교 체육교육학과 1학년 신입생의 첫 등교 현장에는 무려 500여명의 취재진이 몰렸다. 대부분 김연아의 모습을 촬영하러 온 사진기자로 이 날 찍은 사진은 ‘김연아 패션’으로 이름 붙여졌다.
고려대 이기수 총장은 ‘피겨 요정’에서 ‘피겨 여왕’으로 격상된 ‘국민 여동생’ 김연아를 직접 맞았고, 김연아는 수많은 학생들과 취재진 속에서 3권의 책을 도서관에서 빌리는 장면을 연출했다.
당시 취재현장에 있던 한 사진 기자는 “그동안 연예인 같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구름 인파를 몰고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리는 것을 보고 연예인 다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고려대 한 재학생은 “우리 학교에 세계적인 선수가 와서 영광스럽다”면서도 “무슨 연예인이 오는 줄 알았다”고 회상했다.
11일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2009 서울모터쇼는 ‘스포테이너’ 김연아의 위력을 느낄 수 있는 절정의 순간이었다.
김연아의 스폰서 현대자동차의 요청으로 이뤄진 이날 행사에서 김연아는 여성스러운 스타일로 주위의 탄성을 자아냈고, “아반떼 하이브리드 차가 참 좋아보인다. 아직 면허는 없지만 이 차를 한 번 꼭 몰아보고 싶다”며 스폰서십에 충실한 립 서비스를 선보였다. 그녀를 보기 위해 무려 16만명 가까이 몰렸다.
‘피겨 여왕’은 한 기업이 실시한 ‘아침밥을 챙겨주고 싶은 남녀 연예인’을 뽑는 설문조사에서 43.7%를 득표해 그룹 SS501의 김현중(22.9%)과 함께 1위를 차지해 명실공히 연예인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뿐 만이 아니다. 연예인 인기의 척도인 CF 시장에서도 김연아는 최고의 상종가다. 그녀는 한국광고단체연합회 광고정보센터 3월 조사에서 모델 호감도(15.68%) 1위를 차지했다. 3월 한 달 동안에 출연한 CF만도 8개다. 산술적으로 50억 원이 넘는 수입이란 평가가 나온다.
지난 2007년 세계피겨선수권대회에서 동메달을 차지하기 전만 하더라도 무명에 가까웠던 ‘피겨 요정’은 이렇게 ‘피겨 여왕’을 넘어 국내 최고의 ‘스포테이너’가 됐다.
△‘무한도전’ 출연하면 ‘김연아 Week’ 완성=김연아는 25일 MBC ‘무한도전’에 출연한다. MBC는 지난 2007년 9월 22일 ‘무한도전’에 출연한 김연아가 19개월 만에 다시 돌아온다고 강조했고, 김연아 또한 예고편을 통해 “제가 무한도전에 다시 출연하게 됐다”고 말했다.
김연아는 지상파 방송사의 숱한 출연제의에도 불구하고 ‘무한도전’을 선택한 것은 다 이유가 있다.
‘무한도전’이 방송되는 25일 다음날인 26일 오후 6시부터 MBC는 김연아가 출전하는 ‘KCC 스위첸 Festa on Ice 2009’를 독점 생중계한다. MBC가 정식 국제대회도 아닌 철저한 이벤트 형식의 갈라쇼인 ‘Festa on Ice 2009’를 일요일 프라임 시간에 생중계 하는 데는 김연아 효과를 누릴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MBC가 ‘Festa on Ice 2009’ 생중계로 판매할 수 있는 광고수는 약 50개 정도다. 일요일 프라임 시간대 광고는 보통 개당 1000만원을 호가한다. MBC는 김연아 효과로 약 5억 원 정도의 광고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셈이다.
방송가 한 관계자는 “지상파와 케이블 할 것 없이 ‘Festa on Ice 2009’를 생중계하기 위해 분주한 노력을 벌였다”며 “김연아의 출연은 ‘무한도전’도 좋고, ‘Festa on Ice 2009’를 주최하는 김연아의 소속사 IB스포츠 입장에서도 홍보 효과를 누릴 수 있는, 한 마디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아이템”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해외 전지훈련을 하면서도 ‘무한도전’은 빼놓지 않고 본다는 김연아의 코멘트는 일반 시청자 수준의 립 서비스”라며 “25일 ‘무한도전’, 26일 ‘Festa on Ice 2009’로 ‘김연아 Week’를 만드는 것이 MBC와 IB스포츠의 전략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스포테이너는 부진하는 순간 끝장=하지만 방송가 관계자들은 김연아의 ‘무한도전’ 출연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고 입을 모은다. 앞으로 더 많은 CF에 등장하고, 직·간접적으로 방송사 프로그램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실제 2009 세계피겨선수권대회가 끝나고 김연아가 보여준 모습은 스포츠 선수 보다는 연예인에 가깝다. 김연아는 고려대 첫 등교 당시 얼마든지 사전에 취재 양해를 구할 수 있는 상황에서 과감한 행보를 선보였다. 도서관 서적 대출 장면은 연출의 절정이었다.
아이돌 그룹 출신 연예인이 대학교에 입학하면 흔히 보이는 소란스러운 광경과 별반 다르지 않았고, “갈수록 예뻐지는 비결이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에 “그냥 화장해서 그런 것 같다”며 소박한 인터뷰 답변을 내놓던 ‘피겨 요정’일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김연아는 ‘Festa on Ice 2009’ 연습 현장은 비공개와 공개를 오가면서도 축구 남북전에서는 하프타임 때 그라운드에 직접 등장했다. 훈련 일정 외 국내에서 휴식에 집중하겠다는 이전 설명과 달리 각종 스폰서십 행사 현장에도 모습을 나타냈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이 화제가 된 것도 당연지사. ‘김연아빵’, ‘김연아 교복’도 등장했다.
물론 이는 김연아가 상대적으로 수명이 짧은 피겨 선수라서 벌어지는 특수한 현상일 수 있다. 피겨 선수들은 피지컬 적으로 보통 30살 전후로 은퇴 기로에 서게 된다. 동계올림픽과 세계선수권대회, 그랑프리대회를 제외하고 마땅한 수입이 없는 피겨 선수 입장에선 짧은 수명 안에 상업적인 가치를 최고로 끌어올려야 한다.
문제는 현재 ‘김연아 신드롬’으로 치장된 거품이 순식간에 꺼질 수 있다는 점이다. 만약 2010 밴쿠버동계올림픽의 결과에 따라 김연아의 상업성은 치명타를 입을 수 있다.
△김연아는 외모 지상주의의 결정판=더구나 지금 국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김연아 신드롬’은 지지 기반이 지극히 불안정하다. 그녀가 등장하기 전까지 국내에서 피겨는 인지도가 전무한 동계스포츠였다. 우리나라의 유일한 동계스포츠는 쇼트트랙과 이규혁이 선전하고 있던 스피드 스케이팅 뿐인 수준이었다.
그러다 김연아가 그야말로 혜성처럼 등장했다. 미디어는 열광했다. 국민들은 피겨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면서도 은반 위를 수놓는 그녀의 연기에 열광했다.
피겨가 어떤 규칙으로 진행되는지, 어떤 연기로 점수를 얻는지에 대해선 잘 모르면서도 김연아가 우승했다는 사실은 깊이 각인됐다. 졸지에 아사다 마오는 라이벌이라는 이유로 매장됐다. 전형적인 스포츠 민족주의다.
김연아가 2009 세계피겨선수권대회 우승을 차지하자, 분위기는 절정으로 치닫았다. 지상파 저녁 종합뉴스는 그녀를 위해 45분 분량 중 35분을 할애했다.
사실 세계피겨선수권대회는 그다지 월드와이드한 대회가 아니다. 월드컵 축구처럼 전 세계가 모두 열광하는 대회도 아닐 뿐더러 올림픽처럼 대중적인 역사가 깊지도 않다.
한 대중문화평론가는 “세계선수권대회 우승이 그렇게 대단한 성과라면 역도의 장미란이나 남녀 핸드볼과 배드민턴 등이 세계선수권에서 우승했을 때 국민들이 왜 그렇게 침착했는지 모르겠다”며 “LPGA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신지애가 상대적으로 김연아 보다 훨씬 주목을 덜 받고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라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그는 “김연아 신드롬의 근본적인 원인은 우리 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한 외모 지상주의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국내 한 유명 광고기획사 관계자 또한 “피겨는 국내에서 단순한 비인기종목을 넘어 불모지 수준의 인프라 환경을 가지고 있다”며 “세계피겨선수권대회 우승이 이렇게 큰 의미를 갖는 것은 바로 김연아가 차지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연아 신드롬의 실체는 뛰어난 실력도 실력이지만, 스포츠 민족주의와 외모 지상주의에 유독 강렬한 반응을 보이는 우리나라 국민들의 특성과도 매우 연관이 깊은 셈이다.
△연예인은 금물, 미리 금메달 따는 것도 금물=김연아는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스포테이너의 위치에 올랐다. 김연아의 소속사 IB스포츠는 그동안 너무나 헌신적으로 ‘피겨 요정’을 도왔고, ‘피겨 여왕’을 만들었다.
하지만 김연아는 초심을 찾아야 한다. 김연아는 종종 국민적인 높은 관심이 다소 부담스럽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더구나 김연아는 자신의 꿈이자, 오랜 목표인 올림픽 금메달을 달성해야 한다. 김연아 신드롬이 온 나라를 강타하고 있지만, 아직 금메달은 따지도 않았다. 연예인 속성이 강한 스포테이너의 화려함 보다 스포츠 선수 본연의 내구성을 길러야 한다는 조언이 나오는 것도 그래서다.
김연아 본인도 이제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박찬호나 박세리는 최고의 인기를 달리는 순간에서도 결코 가볍게 행동하지 않았다. CF 섭외가 쇄도했지만 철저히 공익적인 광고를 선별했고, 그마저도 조용히 찍고 수익을 사회에 환원했다. 두 사람 모두 전성기에 묵묵히 운동에만 열중한 공통점이 있다.
지난 2006년 경기 군포 수리고 시절부터 김연아를 응원했다고 하는 원조 승냥이 한 네티즌은 “김연아가 딱 두 가지만 했으면 좋겠다”며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준비와 마음껏 쉬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김연아가 올림픽이 끝나고도 가능한 오래 선수 생활을 했으면 좋겠다”며 “은퇴한 후에는 제2, 제3의 김연아가 나올 수 있도록 열악한 국내 피겨 인프라에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 오래 선수를 하든, 지도자가 되든 멋진 스포츠 선수로 남아줬으면 한다”고 소원했다.
김연아가 ‘김연아 신드롬’, ‘스포테이너’란 화려한 명칭을 벗고 스포츠 선수 본연으로 돌아갈 이유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조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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