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정우 “김구남 안에 채플린 있다”
[쿠키 영화] 연예 기자, 그것도 40대에게도 설레는 인터뷰이(interviewee·인터뷰에 응하는 사람)가 드물지만 있다. 몇 번을 마주해도 그 속을 더 알고 싶게 만드는, 미로로 치면 아주 복잡하고도 출구가 보이지 않는 설계이고 인간으로 치면 그 안에 우물이 100개쯤은 자리했을 것 같은데 저마다 깊이도 꽤 되지 싶고 남자로 평가하자면 대한민국에서 흔하지 않은 이목구비에 감성과 야성을 동시에 갖춘 매력남, 하정우다.
주인공이든 조연이든, 카메오든 배역 크기에 상관없이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이지만, <황해>는 그야말로 하정우에 의한, 하정우를 위한 영화다.
영화 <추격자>에서 연쇄살인마 지영민이 되어 ‘추격자’ 엄중호(김윤석)를 튼실하게 받쳤듯, 이번에는 선배 김윤석이 대한민국 영화사상 최고의 카리스마를 내뿜는 면정학이 되어 ‘추격당하는 자’ 김구남을 지원사격 한다. 한쪽이 다른 쪽을 위해 철저히 자신을 배제하고 하는 후원이라면 ‘보는 재미’가 없다. 51:49, 각자의 배역을 최선을 다해 최상으로 연기하는 ‘팽팽한 대결’이기에 영화 보는 맛이 배가 됨과 동시에 두 배우 모두 더욱 빛나는 ‘시너지 효과’가 발생한다.
발이 눈밭에 폭폭 빠지는 2010년 세밑, 하정우를 마주했다. <황해> 시사회 당일, 연내 만남을 예고했던 약속이 지켜진 자리였다.
온순하면서도 거칠고, 어수룩하면서도 용의주도한 김구남, 착한 사람이 살기 위해 악인이 된 그 느낌을 어찌 그리 생생하게 표현할 수 있었는지부터 물었다. 명배우 김윤석이 “캐릭터가 영혼까지 배어드는 연기”라고 극찬한 그 연기의 ‘레시피’가 궁금했다.
“사람은 사실 일관성이 없지 않나요. 수많은, 서로 다른 면모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다면체라는 생각이 들어요. 누구를 만나, 무슨 얘기를 하느냐, 어디에서 만났냐 등에 따라 나의 이 면이 나오기도 하고, 저 면이 나오기도 하고요. 김구남에게도 그렇게 우리네 같은 입체성을 갖게 하려고 노력했어요.”
흔히 극본이나 연기를 비판할 때 ‘캐릭터에 일관성’이 없다고 얘기한다. 어떤 상황에서든, 캐릭터의 고유성을 잃지 않고 연기해 낼 때 우리는 박수를 보낸다. 그런데 하정우라는 배우는 ‘거꾸로’ 연기했다. 마치 제가 김구남이라는 인간인 양, 상황에 따라 만나는 상대에 따라 목적에 따라 다르게 행동했단다. “스토리 변화와 맞물려 크게 크게 변화되는 지점들에 ‘연기의 포인트’를 두고, 김구남 안에서 일어나는 작은 변곡점들을 의식하며 연기했어요.” 웬만한 연기력으론 일관성 없는 연기로 비난 받기 십상인 캐릭터 제조법이다. 의외다.
“한 가지 더 얘기하자면 ‘의외성’이에요.”
맞다, ‘의외다’라는 생각은 기자의 것이 아니었다. 하정우는 영화 <추격자>의 지영민을 얘기할 때도 ‘의외성’을 언급했다. 살인마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와 닮지 않은, 소년 같은 순진함을 지영민에게 ‘의외로’ 부여했고 그것이 관객 분들의 공감을 얻은 것 같다는 소회. ‘또 의외성?’인지 ‘역시 의외성!’인지는 그의 이어지는 말에서 판가름 난다.
“구남이에게는 대사가 거의 없었어요. 도망 다니고, 여관에서 웅크려 자고, 죽여야 할 남자의 창문을 지켜보고, 아내를 찾아 이 거리 저 골목을 헤매고요. 밋밋할 수 있는 동선이었기에 뭔가가 필요했어요. 천안여인숙에서 나설 때 모자 챙 한 번 더 만지고, 도망 다닐 때 괜히 눈에 더 띠게 모자 벗었다 다시 쓰고, 구남이의 움츠러드는 긴장감을 되레 겉으로 표출시킨 거죠. 아내가 일할지 모르는 요정 ‘요설궁’ 앞에서 입구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빵을 게걸스럽게 먹은 것도 ‘의외성’을 통해 ‘리얼함’을 만들어내고픈 의도였어요. 사실 아내가 언제 나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바짝 긴장하고 관찰해야 하지만 말예요.”
“그리고 제 스스로 생각할 때 의외성을 가장 크게 살린 대목은 구남이 살인 청부를 받은 김현수 교수 집 건물 앞에서 잠복할 때에요. 특히 이제는 더 미룰 날도 없이 디데이(D-day)로 정한 날, 조선족 두 남자가 건물 앞을 어슬렁거리잖아요. 그들이 자신을 감시라도 하듯, 감시의 눈초리를 피하기 위해 차 뒤로 숨고 골목 안으로 숨고 그러다 4층 창문에서 피가 튀기고 시체가 뚝 떨어지자 당황해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우왕좌왕…. 그 눈 동그랗게 뜨고 입 벌리며 놀라는 표정, 갈팡질팡 왔다갔다는 하는 바쁜 다리…, 누구 생각나는 배우 없었나요? …찰리 채플린을 생각하며 연기했어요. 사람이 긴박해지면, 비극적 상황이 되면 되레 어처구니없는 행동들을 하지 않나요. 김구남의 그 숨 가쁜 상황에는 코미디 연기가 적합하다고 판단했어요. 대단한 명배우 채플린을 차용했는데, 누가 되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네요.”
의도된 의외적 행동들이 모여 김구남을 살아있는 캐릭터로 탄생시켰으니 하정우의 연기 포인트 중 하나, 의외성은 이번에도 주효했다. 살인범에 소년을 중첩시키는 거대한 이미지 투영을 넘어, 캐릭터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의외성을 부여하는 수준으로 자가 발전시킨 것도 주목된다.
새해다. <추격자>의 김윤석을 만나야 했듯, <황해>의 하정우를 놓쳐서는 안 된다.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는 속내의 일면이 드러나는 글보다는 영화를 통해서…. <황해>는 1월2일 현재, 170만 관객의 사랑 속에 ‘항해’ 중이다. 개봉 첫 주 4일 동안 100만의 환호, 2주차 7일 동안 70만의 지지. 보다 큰 응원이 필요하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홍종선 기자, 사진=이은지 기자 dunasta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