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연예] 헝겊인형을 바늘로 찌르며 누군가를 저주하고, 사약을 거부하며 길길이 날 뛰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같은 인물, 비슷한 스토리 임에도 마치 ‘여고괴담’처럼 반복적으로 브라운관에 다시 등장한다. ‘시대의 요부’ 혹은 ‘희대의 악녀’라는 타이틀이 어울리는 장희빈(장옥정) 얘기다.
‘조선 판 팜므파탈’로 불리는 장희빈(1659~1701)은 역대 사극 주인공으로 가장 많이 출연한 인물이 아닐까 싶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캐릭터의 변화도 생기고 역사적 인물에 대한 다양한 해석도 있었지만 보고 또 봐도 재미있는 캐릭터임은 분명하다.
장희빈이 또 다시 안방극장으로 돌아온다. 새로운 장희빈은 바로 ‘엄친딸’ 김태희다. 내년 3월 방송 예정인 드라마 ‘장옥정’(가제)의 출연이 확정되며 화제로 떠올랐다. 드라마 ‘마이 프린세스’ 이후 2년여 만에 안방극장 복귀인 김태희는 데뷔 12년 만의 첫 사극이다.
드라마 ‘장옥정’은 기존의 장희빈을 그린 드라마와는 달리, 조선시대 패션 디자이너로 활약을 펼친다는 새로운 해석과 보염서에서 화장품을 제조하는 모습 등을 실감나게 재현하며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할 예정이다.
그간 장희빈 역을 연기한 여배우는 대부분 큰 인기를 누렸다. 때문에 당대 최고 여배우가 연기했거나 이 캐릭터로 단숨에 스타덤에 오른 경우가 많았다.
역대 장희빈은 김태희를 포함해 총 9명이다. 김지미(1961), 남정임(1968) 등 당대 최고 스타였던 배우들이 열연했고 이후 윤여정(1971), 이미숙(1982), 전인화(1988), 정선경(1995), 등이 장희빈을 연기한 뒤 톱스타로 발돋움했으며 김혜수(2003), 이소연(2010) 등도 인상 깊은 연기를 펼치며 이미지를 구축했다.
초반의 장희빈 이미지는 사악함과 요염함 그 자체였다. 날카로운 눈매와 차디찬 목소리 등 오락 사극의 정공법적 연출로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특히 이미숙은 장희빈 역으로 톱스타 반열에 오르며 그해 연기대상까지 꿰찼고, 전인화는 기존의 선한 이미지와 전혀 다른 악역을 맡으며 성공적인 변신을 했다.
특히 ‘엉덩이가 예쁜 여자’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던 정선경은 당시 신인으로서 파격 캐스팅이었지만 뛰어난 열연으로 역대 장희빈 중에서 가장 큰 인기를 누렸다. 표독스럽고 뇌쇄적인 눈빛의 정선경은 최후 사약을 받는 장면이 두고두고 회자가 될 만큼 인상 깊은 연기를 펼쳤고, 40%가 넘는 높은 시청률을 견인해냈다.
김혜수는 크고 동그란 눈이 가져다주는 선한 이미지와 평소 ‘건강미인’이라는 칭호를 받았던 만큼 ‘미스 캐스팅’이라는 평이 끊이지 않았으나 그해 연기대상을 수상하며 화려한 한해를 보냈다.
같은 인물, 비슷한 스토리 임에도 왜 사람들은 장희빈에 그토록 열광하는 것일까. 이는 드라마의 구조적인 면에 있다. ‘악녀’ 캐릭터는 극의 자연스러운 갈등과 긴장을 선사하는 소금 같은 존재로, 드라마에 중요한 필수요소 중에 하나다. 때문에 사극에서는 장희빈이 가지고 있는 ‘악녀’의 이미지를 이용해 손쉽게 갈등 구조를 만들 수 있었고 동시에 높은 시청률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뿐 아니라 ‘궁궐의 여인’이라는 점은 매우 비극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비밀스러운 궁궐 여인들의 삶과 사랑 그리고 복수와 증오는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는 극적인 장치임에 틀림없다. 또한 궁녀 출신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 왕비 자리에까지 오르는 한 여인의 인생역전은 남녀노소 공감할 수 있는 스토리 라인에 부합되기도 한다. ‘궁녀’에서 ‘국모’ 자리에 오르는 장희빈의 인생은 어쩌면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장희빈은 조선 왕조 역사상 유일하게 궁녀 출신으로 왕비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아버지는 역관 출신의 중인이었지만 어머니가 여종이었기 때문에 천인(賤人)의 신분이었다. 장 씨는 오래도록 아들이 없었던 숙종에게 왕자를 안겨주고 이에 따라 희빈에 오르게 된다.
인현왕후가 폐출되고 6년간 왕비에 오르나 뒤늦게 후회한 숙종이 인현왕후를 다시 복위시키면서 빈으로 강등된다. 인현왕후가 병으로 죽자, 장 씨가 자신의 거처인 취선당 서쪽에 신당(神堂)을 차려 놓고 인현왕후를 저주한 것이 원인이라고 지목됐다. 이에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가 처형됐고 장희빈 역시 끝내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한다.
그녀를 ‘희대의 악녀’로 묘사하는 것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있다. 단지 왕의 사랑을 얻기 위해 희대 요부로 평가받은 희빈과 당대의 현모양처로 알려진 인현왕후에 대한 평가가 다시 되어져야 한다는 의견도 끊임없이 나왔다. 당시 정치적 상황과 엄격한 신분의 차이를 염두에 둔다면 단정적으로 두 인물을 평가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는 이유다.
평민 출신으로 국모가 된 장희빈은 스스로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온갖 힘을 썼고, 인현왕후는 그녀를 둘러싼 정체 세력들이 보위해주었기 때문에 굳이 나설 필요가 없었다는 해석도 있다. 때문에 온전히 소유할 수 없는 절대적 존재인 임금을 사랑했고 그 옆에 머물기 원했지만 결국 권력에 의해 희생된 ‘가련한 여성’이라는 시선도 있다.
김태희가 그려낼 장희빈이 어떤 모습일지 기대가 되는 것은 이러한 역사적인 다양한 해석과 최근 불고 있는 ‘팩션 사극’ 열풍에 의해 전혀 새로운 캐릭터가 그려질 수 있는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엄친딸’의 반듯한 이미지, ‘여신’으로 칭송받던 기존의 스타성을 바탕으로 김태희가 사극 도전에 성공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두정아 기자 violin80@kuki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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