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IT] 고등학생 김모(17)군은 지난주에 치른 2학기 중간고사를 완전히 망쳤다. 리그오브레전드(롤·League of Legends)를 보느라 공부를 전혀 못했기 때문이다. 김군은 어머니의 눈을 피해 독서실에서 휴대전화로 지난 한 달 동안 내내 ‘롤드컵’(롤 시즌3 월드챔피언십)을 시청했다. 명승부로 불린 한국팀 간 4강전은 몇 번이고 돌려봤다. 김군은 결국 제대로 책도 펴보지 못한 채 시험을 치렀다.
롤이 대한민국 게임업계를 흔들고 있다. 학생들뿐 아니라 게임에서 손을 뗀 직장인들까지 컴퓨터 앞으로 돌아오게 하고 있다. 초등학생부터 직장인까지 빠져들고 있는 롤은 2013년 현재 ‘국민게임’이란 칭호가 가장 잘 어울리는 게임이다.
롤은 3∼5명 영웅이 한 팀을 이뤄 상대방의 건물을 부수는 실시간 전략 대전 게임이다. 가장 많이 즐기는 게임 룰은 5대 5 방식이다. 사용자는 100명이 넘는 수많은 영웅 중 한 명을 선택해 게임에 참여한다. 자신과 한 팀을 이룬 4명과 함께 상대방이 택한 5명의 영웅과 겨뤄 적 팀의 ‘넥서스(본부)’를 먼저 파괴하면 승리한다. 건물을 짓고 병력을 만들어 상대방과 싸우는 스타크래프트 등의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이나 장시간을 투자해 성장을 시켜가며 미션을 수행하는 리니지 등의 롤플레잉게임(RPG)과 달리 자신이 고른 영웅 한 명의 조작에 집중하면 돼 접근성이 뛰어난 편이다.
2009년 미국 라이엇게임즈사가 만든 게임인 롤은 2011년 12월 국내 정식 서비스를 시작한 이후 게임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게임 전문 리서치 회사 게임트릭스에 따르면 롤의 PC방 사용시간 점유율은 40%를 훌쩍 넘으며 압도적 1위를 유지하고 있다. 롤은 국내 서비스 시작 이후 블리자드사의 디아블로3가 출시됐던 지난해 초를 제외하면 1위 자리를 내준 적이 없다.
롤의 인기는 비단 국내 시장에 국한되는 일은 아니다. 게임을 만든 미국은 물론 중국 대만 베트남 등 아시아, 유럽과 남미 시장까지 모든 진출 지역의 게임 시장을 휩쓸고 있다. 오히려 다른 게임업체들이 롤 때문에 장사를 할 수 없는 지경이라고 하소연할 정도다.
롤이 국민게임이 된 건 게임을 하는 맛만 좋아서가 아니다. 야구 축구 등 일반 스포츠를 보는 것 이상으로 ‘보는’ 재미도 있다. 이 덕에 스타크래프트 이후 침체기를 겪던 이스포츠(E-Sports) 업계는 부활의 신호탄이 터졌다며 반기고 있다.
게임을 넘어 스포츠로 가능성이 열리자 스타크래프트 이후 게임업계를 등졌던 대기업들이 속속 돌아오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달 롤드컵이 열리기 직전 롤 프로팀인 ‘삼성 오존’과 ‘삼성 블루’를 창단했다.
월드컵 인기 뺨치는 ‘롤드컵’
얼마 전 한 IT기업에 입사한 김모(26)씨는 입사하자마자 직속 선배에게 황당한 질문을 들었다. 김씨의 선배가 그에게 “롤 하느냐”고 물은 것이다. 롤이 최근에 유행하는 게임 리그오브레전드(League of Legends)라는 정도는 알았지만 회사 선배가 굳이 묻는 건 영 어색하기만 했다. 김씨의 선배는 “요즘 우리 회사에서 롤이 대세야. 같이 하면 다른 선배들과 친해지기도 쉽고 내가 가르쳐줄게 같이 하자”고 했다. 결국 대학 입학 후 해 본 게임이 ‘애니팡’이 전부였던 김씨는 결국 주홍빛의 롤 실행버튼을 눌렀다.
*호기심
단순한 궁금증이었다. 대체 이 게임이 뭐라고 친구들은 물론 회사 동료들까지 모조리 다 빠져있는지 알고 싶었다. 결국 그는 고등학교 3학년 이후 7년여 만에 처음으로 PC방을 찾았다. 롤을 해보라고 유난히 재촉했던 선배가 동행했다.
아니나 다를까, 오랜만에 찾은 PC방 모니터에 대부분은 롤 화면이 번쩍이고 있었다. 지난해 7월 25일부터 지난 13일까지 63주간 PC방 점유율 1위라는 통계는 허구가 아니었다. 심지어 지난달 7일에는 44.04%로 PC방 점유율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게임시작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수많은 영웅 중 한명을 골라 상대방과 싸우고, 적진을 공격하면 그만이었다.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은 다 합쳐도 영웅당 6개에 불과해 복잡할 것도 없었다. 다만 선택할 수 있는 영웅이 100명이 넘어 누굴 골라야 할지가 고민이었다.
우선 컴퓨터와 대전하는 방식인 ‘AI 대전’을 선택했다. 회사 선배는 처음에는 이 방식으로 게임을 하는 일이 욕을 덜 먹는 일이라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게임하는데 왜 욕을 먹는다고 할까’라고만 생각했다. 게임이 손에 익는 건 3시간이면 충분했다.
쉬운 조작방식 덕에 롤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즐기는 게임이다. 롤을 개발한 라이엇게임즈사의 최근 발표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롤에 가입한 회원은 무려 7000만명에 이른다. 게임에 접속하는 국가 수로 따지면 145개국이고, 매일 게임을 하는 회원은 1200만명이 넘는다.
*모욕
컴퓨터 대신 다른 사람과 싸우는 ‘일반게임’을 선택한 게 문제였다. 그제야 선배가 왜 ‘욕을 먹는다’고 했는지 이해가 됐다. 컴퓨터를 상대로는 어느 정도 즐길 만했지만 사람과의 대전은 전혀 다른 세계였다. 오랜 기간 게임을 즐겨온 사람들과의 실력차는 상당했고, 부족한 실력 탓에 전장을 벗어날 때마다 죽음을 뜻하는 검은 화면과 마주해야 했다.
“야 이 XX아. 넌 손가락이 제대로 붙어있냐. 미친XX. XX 못하네.”
몇 차례 연속으로 전사하자 채팅창의 같은 편이 욕을 하기 시작했다. 같은 팀에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아 “미안합니다. 아직 초보라”고 말을 써봤지만 더 험한 말이 돌아올 뿐이었다. “초짜는 롤을 하지 마. 너 같은 XX 필요 없어.”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김씨는 일단 참았다. 팀 게임의 특성상 한 명이 못하면 게임에 질 수 있다는 건 이해했지만 그렇다고 즐겁자고 하는 게임에 욕을 하는 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김씨는 그때 멈췄어야 했다. 자신을 욕하는 같은 편에게 “넌 뭘 잘 하기에 그러느냐”고 말한 게 화근이었다. 김씨를 욕하던 사람은 김씨의 부모까지 욕을 하기 시작했다. 참다못한 김씨는 경찰에 전화를 걸었다. 경찰은 심드렁하게 이런 사건이 한두 건이 아니라고 답했다.
실제 한 경찰서 사이버수사팀 경관은 “하루에도 수차례나 롤 게임과 관련해 고소할 수 있냐는 연락이 온다”며 “모욕·명예훼손 혐의로 고소가 이렇게 많은 게임은 처음”이라고 말한다.
모욕으로 고생하는 사람은 한둘이 아니다. 학교에서는 롤을 잘 못한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는 일도 일어나고 있다. 고등학교 교사인 A씨는 “요즘 남학생들 사이에서는 롤을 잘하는 학생은 인기가 좋고, 잘 못하는 학생은 같이 친구들과 어울리기도 어렵다”며 “롤을 두고 서로 싸우는 일도 잦다”며 한숨을 쉬었다.
경찰에 고소하자니 절차가 너무 복잡해 다른 방법을 찾은 김씨는 게임 내에 있는 ‘배심원단 제도’를 찾았다. 욕을 하거나 게임을 훼방하는 사람에 대해 사용자들이 직접 제재를 내리는 제도다.
라이엇게임즈가 배심원 제도를 만든 이후 지난 8월까지 롤 사용자들은 무려 734만건에 대해 투표했다. 이로 인해 채팅 제한을 받은 게임은 무려 100만8020건에 달했다. 700만건이 넘는 투표가 이뤄질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게임에서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내뱉고 있는 것이다.
된통 욕을 들을 때마다 게임을 끊어야겠다고 생각하지만 강한 중독성이 문제다. 김씨는 여전히 매일 밤마다 롤의 실행버튼을 눌러 게임 속 영웅을 불러내고 있다.
보는 게임도 ‘대박’
리그오브레전드(롤·League of Legends)는 ‘보는 게임’으로 진화하고 있다. 1년에 한 번 열리는 롤드컵(롤 월드 챔피언십)의 우승상금은 골프여제 박인비가 챙긴 US오픈 우승상금(58만5000달러)의 배에 달한다. 롤 관중들은 프로선수들의 게임을 보며 환호하고, 여기에 홍보효과를 노린 기업들은 프로구단 창단과 후원으로 화답하고 있다.
현재 롤 프로구단을 가진 국내 기업은 삼성전자·SK텔레콤·KT·진에어·CJ·나진 등이다. 가장 먼저 롤 팀을 창단한 CJ를 비롯해 이들 팀은 롤 프로팀 후원을 통해 게임을 즐기는 10∼20대 청소년들에게 다가가고 있다.
프로팀 중 가장 성과가 좋은 곳은 SK텔레콤의 T1이다. 지난 5일 끝난 롤드컵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SK텔레콤 T1은 중국의 로열 클럽을 3대 0으로 가볍게 꺾고 우승상금 100만 달러(약 11억원)를 거머쥐었다. SK텔레콤은 이 경기가 전 세계에 송출되면서 막대한 홍보효과를 누렸다.
롤 개발사인 라이엇게임즈는 롤드컵 시청자가 1000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 결승전이 열린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스테이플스센터에는 1만1000명의 관중이 몰렸다. 국내에서도 인터넷 중계로만 200만명이 넘는 팬들이 한 달간의 롤드컵을 시청했다.
다만 막대한 홍보효과를 누린 SK텔레콤은 못내 아쉬운 표정이다. 1000만명이 넘는 시청자가 SK텔레콤을 기억할 수 있는 기회인데 정작 해외에서 벌이는 사업이 없기 때문이다. SK텔레콤 스포츠마케팅팀 관계자는 “임원들도 이런 기회에 해외사업이 있었다면 하고 아쉬워하고 있다”며 “그래도 국내 청소년들에게 SK텔레콤의 젊은 이미지를 확실하게 심어줄 수 있어서 매우 만족하고 있다”고 말했다.
롤드컵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게임전문 케이블방송 주최로 계절마다 열리는 대회가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지난해 여름 열린 대회는 케이블 방송에서는 기록적인 4%대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심지어 돈을 내고 게임을 보러 오는 ‘유료관람’ 문화도 정착되고 있다. 지난 6월 15일 열린 ‘LOL 챔피언스 스프링 2013’ 결승전은 9255석의 자리가 예매 20분 만에 매진됐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진삼열 기자 samuel@kmib.co.kr